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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운동과 기독교 신앙

조회 수 5710 추천 수 0 2014.01.04 21:31:12

성령운동과 기독교 신앙


- 정이철 목사 


MBC의 ‘PD수첩’이라는 방송을 통해 조용기 목사의 많은 비행이 모든 사람들 앞에 소상하게 소개되었다. 나는 여기 미국에서 그 방송을 보면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성령운동’이라는 것에 능한 ‘성령사역자’들 대부분에게서 이런 인생 패턴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때 상상할 수도 없는 존경, 인기, 명예, 부를 누리면 승승장구하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몰락한다. 이것이 성령운동가들의 일반적인 인생의 패턴이다.



성령운동의 현대적 기원은 ‘아주사 부흥(?)’ 


성령운동의 기원은 1900년대 초에 ‘아주사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특이한 영적인 현상이었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지금 전 세계 교회의 1/4이 연관되어 있는 오순절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때부터 이상한 현상이 대두되었다. 능력을 받은 탁월한 인간을 강아지같이 따르면서 온갖 이적들을 일으키는 성령(?)이 출몰하였다. 조용기 목사도 그 계열의 사람인데, 다만 그의 활동의 규모가 너무 대단하여 함부로 언급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 계열의 위대한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성령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이 집회를 열고서 성령에게 역사해 달라고 요청하면 성령이 일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방언이라는 소리현상이 가장 흔하게 나타나고, 그 외에도 향기, 몽롱함, 마음이 알딸딸해짐, 진동, 쓰러짐, 병 고침, 전기가 흐르는 느낌, 환상, 음성 등이 성령의 운동으로 인해 많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런 현상들을 ‘성령세례’라고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 하나님이 부으시는 성령을 받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령세례인데, 그들은 그 은혜를 이미 입은 착실한 성도들을 능력을 준다면서 꼬여내어 이런 괴이한 짓을 벌인다. 그리고 그것이 능력의 ‘성령세례’라고 한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제 3의 물결운동에서는 ‘기름부음’이라는 말로 조금 비틀어 순진한 영혼들을 더 간교하게 미혹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좀 더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성령체험’이라는 말을 앞세우며 비슷한 그 짓을 미화하였다. 


성경의 영감(inspiration), 정확무오함,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울지 않는 교회들을 복음주의에 속한다며 다 믿을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왜냐하면 표면상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은 죽이는 사탄의 전락이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주사부흥-오순절 운동’을 통해 사탄은 ‘성령’이라 불리우는 거짓된 영을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저항하지 않고 받게 만들었다. 그 일이 일어나는데 크게 쓰여진 사람들이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성령운동가들이다. 



성령운동은 일종의 ‘접신술’ 


잠시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언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령을 부릴 수 있는 면허를 내 주셨는가?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일은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힘(power)이 아니고, 성령은 하나님 그 분이다. 우주를 지으시고,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어찌 죄인이 그 분을 부리고 조종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방언-성령세례’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뛰는 성력사역자들의 집회에서는 그것이 이상하게 잘 나온다. 시골 마을에서 개 한 마리가 먼저 짓으면 다른 개들이 따라 짓듯이 줄줄이 나온다. 잘 안 나오면 ‘할렐루야! 할레루야!’ .. 계속 따라하게 하고, 막춤을 추듯이 흔들면 성대를 풀어주면 기어기 나오고 만다. 어떻게 방언이라는 것이 사람의 유도를 따라서 그렇게 나올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성경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신비주의 현상일 뿐이다. 신비주의란 그냥 신비하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영적인 현상이 분명히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경(예수 그리스도)이라는 좁은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접하게 만드는 사술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접하는 유일한 영적인 길은 오직 성경이라는 좀은 문이기 때문이다. 성령운동가들을 활동을 따라서 ‘성령’이라고 부르는 신이 사람의 집요한 의지와 요구를 따라서 방언 등의 다양한 현상을 주는 현상은 성경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의 성령이 성경의 성령이 결코 아니라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운동은 본질적으로 거짓된 하나님, 사탄을 접하게 만드는 악한 사술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오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예수님은 영혼의 거듭남에 대해 무지했던 니고데모에게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다. 바람은 사람의 힘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바람의 실체를 느낄 수는 있으나 사람이 바람을 발생시키거나 그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인간이 성령을 향하여 “오시옵소서! 임하시옵소서!” ... 라고 설레발 떨 수 있겠는가? 그리해도 성령은 따르시지 않고, 혹 그 말을 따르는 영이 나타나면 이미 사탄의 사술이 시작된 것이다. 



코브라 쑈 같은 성령운동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게으른 사람처럼 100% 수동적인 태도만 취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은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성령은 인간에게 자신을 체험시키려고 애쓰는 하나님이 아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예수님)을 이해시키고, 적용시킴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성령 이해의 핵심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 16:13-15)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고, 선포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방법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죄에서 거듭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으키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며, 그 말씀 안에서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사모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은 그 현상에서 반드시 역사하신다. 말씀을 배우고 그 내용에 순종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의 범위 안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일으키는 성경적인 원리이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높아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복하고 그 안에서 믿음을 발전되기 시작한다. 이상한 감성모드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비슷한 평행선을 긋기 시작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진리와는 무관하게 성령을 경험하게 만드는 운동과 기술이 등장했다. 인간이 의도, 요청, 부드러운 강요를 따라서 성령이 꼭두각시처럼 운동하게 하는 고도의 기술이 개발되었다. 그들을 ‘성령사역자’라 부르고, 그들이 하는 짓을 ‘성령운동’이라고 한다. 그 실상은 인도의 뱀 꾼의 코브라 쇼와 같다. 그들이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피리를 불면 그 속에서 동아리를 틀고 앉아있던 뱀이 일어서 머리를 치켜든다. 피리 소리를 따라서 움직이는 코브라를 보며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성령사역자라는 사람들의 성령운동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이런 코브라로 쑈와 유사하다. 


대체 그 성령사역자들은 어디에서 그런 기술을 전수받았을까? 그들이 판을 벌이면 어떻게 성령이 기어 나와서 방언을 주고, 치유를 주고, 쓰러지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웃게 만들고 ... 등의 신기한 현상은 일으키는 것일까? 하나님이 성령을 어떤 사람의 전속 파트너가 되어 다르라고 명령하셨을까? 기독교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성령을 맘대로 부리고, 초청하는 기술을 부리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들과 노는 사람들이다. 얼마 동안에는 뭔가 되는 것 같으나 반드시 훗날 합당한 대가를 치른다. 성령운동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인생이 불행과 허망으로 귀결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부렸던 영은 성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령을 가장하는 마귀의 영들과 멋있게 놀았던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 자신들도 속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럽히는 마귀에게 부림을 당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쓸모가 없어지니 마귀는 또 다른 사람 사람을 골라서 내세운다.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 정체를 밝히신다. 그래서 성령운동가들의 인생이 결국 몰락하는 것이다. 



성도를 위하는 성령세례 운동은 사술 


이미 성령받은(구원받은) 성도를 위하여 성령세례 운동을 펼치는 것이 성령운동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비성경적이다. 성령세례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가 제거된 신자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부으시어 하나님의 양자되게 하시는 은혜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실한 성령세례의 의미와 실체는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참 신앙이 생기고(갈 4:6), 

2)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주로 믿게되고(고전 12:3), 

3)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구원을 누리고(고후 1:12,22), 

4)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이루는 부활과 영생에 동참하고(요일 4:13), 

5)성전이 된 성도의 삶과 인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과 성결이 이루어지고(고전 6:19), 

6)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구현되고(요 14:17), 

7)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선전하는 삶(요 16:14,15)을 살게 된다. 


이러한 성령세례는 신자의 인생에서 단 한번이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 성령세례가 임한다. 그 후부터는 성령이 떠나지 않고 영구히 그 사람 안에서 내주하시면서 인격적으로 다스리고 통치하신다. 성령세례 이후부터의 성령의 역사는 ‘성령충만’이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과 함께 출현한 성령운동은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에게 또 성령세례가 임해 사람 소게서 성령이 차고 흘러넘치게 된고 한다. 이미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 또 성령을 받게 만든다. 그러다 뭘 체험하였다고 난리를 부린다. 성경에 없는 사악한 사술이다. 성령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성령은 다시 오시지는 않는다. 성령이 다시 오시어 쓰러뜨리고, 웃게 만들고, 알딸딸해지고, 향기를 맡고, 성령춤을 추고, 방언이라는 소리를 내고 ... 말 그대로 신비주의이다. 


온누리교회의 장로인 손기철 씨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들을 불러 모아 성령을 기름을 부어준다는 집회를 지금도 부지런히 열고 있다. 그것도 매우 비성경적인 사술이다. 성경은 예수님 처음 믿을 때 부어주신 성령을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요일 2:27)이라고 한다. 손기철 씨가 이미 성령받은 성도들을 불러모아 또 기름부음을 준다는 것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단적인 행태이다. 혹 그 자신이 다시 성령을 보내는 종교를 창시하는 하나님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손기철 씨를 비롯하여 성도에게 성령이 예수님 처음 믿을 때에 기본적으로 임하고, 이후에 ‘권능의 성령세례’가 계속 반복된다고 주장하는 성령운동가들은 다음의 성경의 내용에서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이야기한다. 


1)성령으로 출생하신 예수님이 다시 요단강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것, 

2)예수님 생전에 구원받은 제자들의 사도행전 2장의 성령세례를 받고 능력이 넘치게 된 것, 

3)사도행전 2자에서 성령세례 받은 제자들이 사도행전 4장에서 또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충만해 졌다고 기록하는 내용, 

4)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전도로 성령을 받은 사마리아 새 신자들에게 다시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한 것, 

5)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교회에 성령이 임한 사건 


그러나 이 내용들은 성령받은 성도가 다시 권의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모두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만들어 낸 억지주장들이다. 신자의 일생에서 성령세례는 단 한번이다. 처음 진실하게 믿을 때 성령세례가 임한다. 그리고 성령세례 이후에는 성령충만으로 나아간다. 성령충만은 신앙생활 중간 중간에 성령을 더 받는 것이 아니다. 처음 믿을 때 임하신 성령이 떠나시지 않고 인격적으로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받은 성도를 대상으로 ‘성령세례’ 또는 ‘기름부음’ 운동을 펼치는 것은 성경적 기독교에서 용납되지 않는 이단운동이다. 



성령운동의 기본기는 옹알거리는 소리현상(방언?) 


성령을 부리는 놀라운 성령사역자들의 기본기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재주이다. 그것은 흔히 방언이라고 부르고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지금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방언을 ‘이상한 소리현상’이라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흔한 방언이라는 소리내는 현상이 성경의 진정한 방언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성경의 방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이었고(행 2:4), 

2)배운 적이 없는 이방인들의 실제 언어로서 불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고, 기존 신자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만들었고(행 2:8-11), 

3)뜻이 분명하고 통역이 가능하여 성경의 방언은 반드시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성도들을 대상으로 시행되었고, 즉시 통역하여 모든 성도가 영적인 유익을 얻었고(고전 14:27), 

4)성경의 방언 그 자체가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계시임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는 복음의 이적이었고(막 16:17), 

5)이방인의 언어방언을 통해 예수님 믿는 이방인도 성령받아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을 유대인들이 목격하고 이방인들은 교회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적이었고(고전 14:21), 

6)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연합되는 신약 교회가 설립되고(행 10:44-48), 성경계시가 완성됨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고 사라졌고, 실제로 초대교회 이후에 정통교회에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증언하는 많은 교회사적인 증거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 날의 흔한 방언이라는 소리현상에는 전혀 이런 성경적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그럴싸한 소리에 불과하고, 힌두교, 무당, 불교, 무슬림, 샤마니즘, 몰몬교, 정신병자, 최면술 등에서 목격된다. 누구도 그 뜻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뜻을 알겠다는 사람이 혹 있어도 각각 제 멋대로 말한다. 이러한 웃기는 소리를 가지고서 성경의 방언이라고 하고, 그것이 성도에게 권능을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가르치는 것이 한심한 짓거리인가. 우리는 속히 이 사실을 전 세계의 모든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널리 알려 구원의 복음을 전하하는 진정한 기독교가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성령운동을 일으킨다는 사람들은 그런 거짓을 날마다 전파하고 있다. 과연 그들과 일하는 영이 성경의 성령일까? 



조용기 목사의 거짓된 방언 


한국의 조용기 목사도 전 세계를 대표하는 오순절 운동의 성령운동가이다. 그의 신앙과 사역의 가장 밑바탕에는 ‘방언-성령세례’라는 그릇된 기본기가 깔려있다. 조용기 목사는 성도들이 가급적 수시로 방언기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다음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4차원의 영성」에 기술된 내용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항상 방언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기대하며 그 능력에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조용기 목사의 기독교 신앙에서는 방언기도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수시로 방언기도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과연 그는 성경 어디에서 방언기도라는 것의 근거를 찾고 있는 것일까? 조용기 목사의 책「4차원의 영성」을 보니 그의 종교 속에서 그렇게 중요하다는 방언기도에 성경적인 근거로 드는 내용이 매우 우습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부정하는 유대인 불신자들에게 약 16개 이방인 국가들의 실제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사도행전 2장의 외국어 이적(방언)을 근거로 지목했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 고넬료 가정의 방언,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교회의 방언을 그 근거로 언급하였다. 


한마디로 조용기 목사는 그저 방언이라는 것이 나오니까 무조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 어디를 통하여 정당한 기독교 신앙의 범주에 속한다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신학적인 사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무조건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분별하지 말고 시행해야 한다는 자세는 신비주의이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합법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도록 주신 유일한 진리인 성경을 통해 설명되지 못하는 사술, 즉 결국에는 하나님을 가장하는 사탄을 체험하게 만드는 접신술이다. 조용기 목사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영적인 일이 성경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장하는 사탄에게로 인도하는 접신술이라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으로 설명되지 못하고, 성경 안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크게 벌이고 사람들을 모으고 인기를 누린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청천벽력을 보낼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인터넷에 있는 한 영상을 보니 조용기 목사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 앞에서 방언이라는 소리를 공개적으로 내고, 스스로 통역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시는 직통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과거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매우 흔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생생한 장면이 담긴 영상이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에게 매우 멋있게 보여지고 있다.



조용기 목사처럼 완성된 특별계시인 성경 밖에서 하나님의 직통의 말씀을 수납하는 행위는 지극히 불건전한 사기행각이다. 정통교회들은 이러한 일을 용납하지 않고 이단시하며 매우 경계한다. 저런 일하는 위대한(?) 사람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 성경을 근간으로 하는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교만하고 거짓된 일이기 때문이다. 심한 말로 양복입은 박수무당과 해당되는 일이라고 조롱받아도 할 말이 없다. 대체 스스로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리고, 또 통역이랍시고 스스로 눈을 내리뜨고 더듬거리면서 주절거리는 저런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만일 저런 소리를 통역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 사람도 통역하게 한다면 과연 무슨 소리가 나올까?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누구의 통역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것저것 길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조용기 목사를 통하여 직통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예언(계시)의 말씀이 과연 조용기 목사 본인의 인생과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성취되었을까? 그것을 조사해보는 것이야 말로 저런 방언이란 것, 저런 일을 행하는 사람의 정체를 알게 해 주는 가장 정확한 자료가 나일까?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 18:22) 



조용기 목사의 비성경적인 성령세례 사상


믿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는 거짓된 성령세례 사상도 조용기 목사의 신앙과 사역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기본기이다. 조용기 목사는 목회하는 동안 내내 이런 이상한 소리현상이 신자에게 권능을 주는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매우 강조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책「4차원의 영성」에서도 방언기도가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방언 기도는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바울이 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 믿음으로 성령받아 중생한 성도에게 다시 권능을 주는 성령세례가 임하고, 방언이 그 증거로 따라온다는 내용이 없다. 이것은 ‘아주사 부흥’이라는 이단적인 현상들을 일으킨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 즉 찰스 펄햄(Charles Parham, 1873-1929)과 윌리엄 세이모어(William Seymour, 1870-1922) 등과 그들의 사상을 따르는 대부분의 오순절 운동의 성령운동가들이 일방적으로 하는 말일 뿐이다. 바울은 그 많은 성경을 저술하면서 단 한 번도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믿는 자에게 성령세례가 또 임한다고 추측할 수 있는 그 어떤 말도 바울의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조용기 목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4-10절에서 말한 성령의 은사에 관한 내용에 관한 내용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아홉 가지의 성령의 은사들, 즉 1)지혜의 말씀, 2)지식의 말씀, 3)믿음, 4)병 고침, 5)능력 행함, 6)예언, 7)영들 분별함, 8)방언 말함, 9)방언들 통역하는 은사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조용기 목사는 여기의 7번 ‘방언 말함’을 지금 자신과 대부분의 성령운동가들이 강조하는 ‘방언 기도’의 현상이라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틀린 이야기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고 그 뜻을 다시 헤아려 보니 ‘다른 사람에게는 다양한 방언(언어)을’라고 번역해야 할 내용이다. 여기의 방언도 사도행전 2장의 실제 언어의 방언을 뜻하는 바로 그 단어이다. 성령께서 배우지 않은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복음에 대해 말하는 은사를 주신다는 뜻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은사를 이야기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도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이라는 의미를 살려서 ‘각종 방언 말함을’이라고 번역하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성경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은사에 관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 14:14)라는 내용이 딱 한번 등장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방언과 기도가 연결되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러나 전후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주신 외국어서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인 방언과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섞지 말고, 오용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방언과 기도를 섞는 행위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할지라도”라고 표현한 것이지, 방언으로 기도하는 은사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배운적 없는 외국말로 복음을 설명하는 은사를 기도 시간에 하나님을 향하여 풀어 놓는다고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혹 영혼은 그 뜻을 알지라도 이성은 전혀 모르는 소리이므로 유익이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앞에서도 외국말 방언은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통역되지 않는 방언을 교회에서 다른 사람이 듣도록 말하는 것은 잡소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조용기 목사의 이상한 예언 


조용기 목사는 예언에도 능하다고 소문이 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예언의 은사는 모든 유명한 성령운동가들이 자랑하는 또 다른 기본기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한 성령사역자들이 대중에게서 신임을 잃고 추락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예언의 은사(?)이다. 윌리엄 브랜험(William M. Branham, 1909-1965), 캐더린 쿨만(Kathryn Kuhlman, 1907-1976), 오랄 로버츠(Oral Robert, 1918-2009), 신디 제이콥스(Cindy Jacobs)... 등의 오순절 운동 배경에서 성장한 쟁쟁한 성령사역자들은 모두 예언의 은사에서도 큰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 예언 때문에 망신을 당하고 몰락했다. 예언하는 사람치고 예언 때문에 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와 오늘 날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의 예언의 은사가 전혀 다른 것임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조용기 목사도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사람에 해당한다. 조용기 목사는 1990년 초에 미국의 워싱턴 주 씨애틀의 한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 지도를 가져오게 하여 플로리다 주의 펜사콜라(Pensacola)라는 도시를 가르치면서 이렇게 예언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닷가 도시인 펜사콜라에 부흥을 보내려 한다. 이 도시로부터 불길이 일어나 마침내 전 미국이 타버릴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이 거짓된 예언은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유명한 인터넷 백과사전에까지 수록되어 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1995년부터 팬사콜라에서는 아주 지저분하고 더러운 사탄의 웃음부흥이 일어났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탄의 거짓된 부흥을 하나님이 보내시는 거룩한 성령의 부흥인 것처럼 예언한 조용기 목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조용기 목사는 정말 성령이 쓰신 신령한 사람이었을까? 그 외에도 신사도 운동을 일으켜 전 세계 교회를 타락시킨 장본인 피터 와그너를 여의도 순복음 교회로 초청하여 그의 신사도 운동 사상을 전파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고, 저질적인 성령운동가 베니 힌을 초청하여 성도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 


조용기 목사는 자신의 저서「4차원의 영성」에서 비성경적인 사실을 크게 유포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적극적인 말과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 우리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4차원 영적세계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4차원에 의해 지배되는 우리의 3차원의 삶이 자연스럽게 성공하고 번영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믿음 안에 있으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4차원을 프로그램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대로 생각하고 믿고 꿈꾸고 말하며 행하는 4차원의 프로그램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라는 것은 새롭게 프로그랭된 4차원의 요소를 하나님께 올리는 작업입니다. 즉 4차원의 세계를 프로그래밍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의 믿은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것대로가 아니라 ‘네 생각대로, 네 믿은대로, 네 꿈대로, 네 입의 말대로’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십니다. 이는 우리의 4차원을 우리가 프로그래밍해야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감추지 못합니다. 4차원의 하나님 앞에 벌거벗긴 채로 점령당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4차원의 세계를 제대로 잘 프로그래밍하면 축복이 쏟아집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롭게 프로그래밍하십시오. 새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의 프로그램을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이면 청조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깊고 심오한 절대 진리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4차원의 생각, 믿음, 꿈, 말을 기도와 말씀과 성령으로 훈련시키십시오. 당신의 삶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책에서 발췌한 위의 내용에 의하면 우리의 미래는 모두 우리의 꿈, 말, 생각에 달려있다. 지금 우리들의 생각과 말, 꿈, 행동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4차원 영적세계를 복되게 조성하고 재배치하고 있으니, 지금 우리의 생각과 꿈과 입의 말을 잘 관리하면 틀림없이 성공하고 번영하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4차원의 영성’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 


조용기 목사는 이러한 해괴한 영적인 원리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하여 주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으로 종결되었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주는 완전하고, 충분하고, 완성된 계시이므로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정통 신학이 조용기 목사에게는 한낱 휴지조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저에게 ‘4차원의 영적 세계’에 대해 계시하셨고, 저는 그것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먼저 영어로 썼습니다. 그 내용을 책으로 접한 미국, 남미, 유럽, 아프리카 등지의 사람들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성령님의 프로그램을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이면 청조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깊고 심오한 절대 진리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4차원의 생각, 믿음, 꿈, 말을 기도와 말씀과 성령으로 훈련시키십시오. 당신의 삶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4차원의 영성의 배경은 뉴 에지(New Age) 철학 


오순절 운동의 성령사역자들에게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적극적인 말과 긍정적인 사고의 능력에 대한 이런 주장은 성경 구절들과 결합되어 이미 교회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포장되어 우리의 신앙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뉴 에이지(New Age) 철학이다. 뉴 에지 철학은 인간을 타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 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로 본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으나 타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는 하나님과 같은 인간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구상)과 말씀에는 그 내용이 성취시키는 ‘창조적 능력’(Creative Power)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대해 품으시는 모든 구상과 그 입으로 내 보내시는 모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뉴 에이지 사상은 하나님과 신성을 공유하는 인간의 생각과 말 속에도 그러한 능력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언어, 믿음, 꿈, 생각을 품으면 장차 현실 속에서 그대로 된다고 한다. 즉, “돈 벌기는 어렵고 힘들다!”라고 생각하고, 믿고, 말하면 언제가 돈 벌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나에게 찾아 들어온다!”라고 생각하고, 믿고, 말하면 돈을 많이 쉽게 버는 현실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대단히 그럴싸한 이야기이지만, 타락한 죄인을 창조주 하나님의 반열에 세우는 망령된 사상이다. 인간의 교만과 욕망을 부채질하는 이런 요설이 성경의 몇 구절들과 결합되어 정말로 그럴싸한 하나님의 비밀의 말씀이 되어버렸다. 성경은 인간의 미래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에 달렸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복을 누리는 조건은 오직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아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구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4차원의 세계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성하여 내일의 성공과 번영을 창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여 성령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을 기버하시고, 하나님이 즐거이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더 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에 힘쓰는 것이지, 4차원의 영계를 바꾸어서 우리 자신의 내일을 번영하게 하려는 것이 성도의 기도가 아니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믿음’도 성경적인 정의와 이해에서 벗어났다.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4차원의 영적세계를 우리에게 복이 되도록 프로그램밍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구원과 영생의 도리를 전적으로 수용하여, 그 안에서 우리 자신들의 생각, 목표, 가치관을 바르게 정립하여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그 결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주신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믿음’, ‘기도’는 인간이 도를 닦아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도교나 다른 이방종교의 개념이다. 



생각, 말이 신령하면 복을 받는 성경적인 이유 


성도는 생각, 말에 대한 조용기 목사의 말은 성경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한다. 당연히 우리는 말과 생각을 바르게, 건전하게, 긍정적으로, 신령하게 간수하고 구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격과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성도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냉소적이고, 몰인정하고, 탐욕적이고, 폭력적인 생각과 말을 일삼으면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어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신령한 복과 은혜를 주시겠는가? 사도 바울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가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하지 않도록 신령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으니라.”(엡 4:30) 


우리들이 긍정적으로 말하고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거하시는데,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말하고, 신령한 생각을 품고 살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처럼 적극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4차원의 영계를 프로그래밍함으로 내일의 번영과 성공을 창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같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소문난 최대 규모의 교회의 목사가 그 동안 이런 그릇된 것을 그렇게 강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하다. 왜 그 동안 이 사실을 한국 교회는 바로 잡지 못했을까? 


조용기 목사가 강조하는 것처럼, 성경은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이 반드시 형통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더욱이 인간의 사고, 말, 믿음, 꿈 등의 기술에 의해 영적인 세계가 원하는 대로 조성되어 행복과 건강, 번영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가르치는 내용은 더욱 찾을 수 없다. 조용기 목사의 인간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말, 믿음, 생각, 꿈을 내 뿜어서 4차원의 영계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프로그래밍하여 내일의 번영과 성공을 창조하여 낸다는 주장은 전혀 기독교와는 관련이 없는 소리이다. 이런 거짓된 사상을 가진 사람에게서 성령이 역사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윤리적인 사람을 크게 쓰시는 성령? 


조용기 목사는 국내외에서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다수의 불치병자들을 고쳤다고 알려져 있다. 성령사역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임으로서 그에게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기, 명성, 부가 따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도 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사도들도 꿈꾸지 못했던 대형교회를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인간의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부와 인기를 누렸다. 그가 목회 전성기를 구가할 당시에 그의 안수기도 받기를 받고자 원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도 조용기라는 이름은 아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 그 자신과 가족들이 저지른 엄청난 금액의 재정부정과 개인적인 범죄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 교회의 황제의 자리에서 추락하여 한국교회의 수치가 되었다. 성령의 이적을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일으켰던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성령이 크게 쓰신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윤리적인 일들을 많이 자행했다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비윤리적인 사람이 성령의 큰 일꾼이 된다는 말씀이 없다. 성령은 거룩하신 분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하여 하나님을 삶으로 행동으로 경외하게 만드시는 분이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에게서는 이러한 성령의 성품이 발견되지 않는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령사역자인 조용기 목사는 왜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드는 수단으로 추락하였을까? 그를 부렸던 영이 성령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외에 다른 결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건전한 신앙 


이미 구원받은(성령받은) 신자들을 대상으로 ‘성령세례’(기름부음) 운동을 전개하는 유명한 성령운동가들의 인생에서 왜 이런 패턴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을 사람이 부리는 성령운동이 기독교와 관련없는 사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본인도 몰락하고, 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신앙도 변질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성령을 부리려는 성령운동이라는 것에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말씀 배우기를 사모하고, 말씀 안에서 힘써 기도하는 성경적인 신앙생활에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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