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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color:">뉴스앤조이에서도 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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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보기도라는 것에 대해 잘 몰랐다. 믿음이 연약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보기도라는 말과 개념을 퍼뜨린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의 엄청난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특히 하나님을 위해 중요한 자리에서 사역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중보기도라고 알고 있었다.


<b>잘 모르면서 따라했던 중보기도</b>

더치 쉬츠(Dutch Sheets)가 쓴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라는 책이 있다. 한국교회의 중보기도에 대한 관심과 헌신을 일으키는데 크게 영향을 미친 책이다. 이동원 목사님께서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써 놓으셨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이 당시 한국 교회 안에서의 이동원 목사님의 영향은 실로 엄청났을 때이다.

“기도의 강력한 공동체로 지역 교회를 무장시킨 후, 전 세계를 다니며 중보기도 사역의 비전을 나누고 있는 더치 쉬츠의 이 기도 교과서는 이 시대에 주께서 허락하신 더없는 소중한 선물이라고 할 만합니다”(이동원 목사)

이동원 목사님께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기도가 중보기도라고 여기면서 이렇게 쓰셨던 것 같다. 기도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고, 더욱 힘써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 중보기도운동이라고 믿었고,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신학적인 위험성에 대해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셨던 것이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중보기도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사도 운동가들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그들에게 중보기도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북한구원, 낙태추방, 동성애 반대 등의 issue를 가지고 대외적으로 강력한 중보기도를 표방하는 단체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비로소 중보기도운동의 위험성을 자세하게 보게 되었다.  

중보기도운동이 나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중보기도운동이 일어남으로 얻은 유익도 있었다. 기도하자는 운동이니 당연히 기도에 대해 더 공부하고 열정을 쏟게 되었다. 성도들이 목회자, 교회, 선교사, 통일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에 대한 오해가 일어났고, 무속적인 이해와 현상까지도 나타나는 부작용이 함께 일어났다는 것이다.


<b>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중보 개념의 기도</b>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는 누구에게서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중보기도라고 배웠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는가?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가르쳤는가? 전혀 아니다. 물론 성경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자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런 말씀들 속에 ‘중보’(intercede, 또는 ‘중재’(mediate))라는 개념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새벽기도’, ‘철야기도’와 같은 말도 성경에 보이지 않으나 교회에서 잘 하고 있고, 문제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신학적인 위험성이 있으므로 이런 용어의 문제와 중보기도 문제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중보기도운동은 70년대부터 시작되어 90년대에 들어 세계 교회에 널리 퍼졌다. 이제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안 쓰는 교회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제 와서 중보기도가 비성경적이라고 말을 꺼내면 여러 사람들이 불편해진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 속에서 중보기도의 개념이나 정신을 가르치는 내용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이 사실을 더 잘 알고 있다. 다음은 중보기도 운동을 대표하는 미국의 신디 제이콥스(Cindy Jacobs)의 말이다.  

“중보기도의 은사는 성경에서 그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음악의 은사나 교회에서는 안내 봉사의 은사, 혹은 음향기기를 직접 다루는 은사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신디 제이콥스)

중보기도의 은사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교회에 중보기도라는 사역(ministry)이 필요 없다는 것이고, 중보기도의 직책(직분, office)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날 사도의 직분(office of apostle)이 교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계시를 수납하여 성경을 저술하여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사도의 은사가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선지자라는 직분(office of prophet)이 교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성경이 완성되었고,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 성경을 교회에 가르치고 적용할 장로(감독, 오늘 날의 목사 등)의 직분이 세우짐으로 초대교회의 단회적이고 임시적이었던 선지자의 은사가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성도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소개되어 있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의 은사들의 목록에 중보기도의 은사는 없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구약 시대에는 모세, 사무엘, 다니엘 등의 인간에게 중보기도의 은사가 주어졌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그 누구에게도 중보기도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종적이고 완전한 중보자로 오시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중보의 사역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는 십자가를 지신 중보자로 인해 하나님의 용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 됨, 성도가 영원한 행복과 영생을 누리는 시대이다. 구약 시대처럼 참 중보자를 기다리고, 각 시대 마다 하나님이 세우신 불완전한 인간 중보자의 중보사역과 기도를 의존하는 시대가 아니다.

신약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다른 누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완전한 중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누리고 전파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사역과 삶을 ‘중보적이다’라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수고와 고난을 감당할 뿐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중보기도를 스스로 잘 하는 사람들이 중보기도 운동가들이다. 신디 제이콥스라는 미국 여자도 그 대표적인 사람인데, 중보기도의 은사를 주장하는 그녀의 논리는 좀 비루하다. 교회음악(찬양), 예배안내, 음향기기를 조작하는 은사도 성경에 열거되어 있지 않으나 지금 교회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말이 안 되는 이상한 논리이다. 교회음악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많다. 그리고 성경에 교회음악에 대한 은사가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교회의 음악을 위해 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음악을 한다. 나만 해도 혼자서는 테너, 베이스의 음을 내지 못하지만, 잘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어느 정도는 된다. 미국의 학교를 보면 모든 학생들이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연주하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음악을 잘한다.

예배안내도 그렇다. 꼭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만 예배안내를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일꾼이 부족한 개척교회를 인도하고 있다. 교회 나온 지 불과 6개월 된 사람에게 예배 안내를 맡겼더니 그런대로 잘 하셨다. 일본식 레스토랑을 운영하시는 분인데, “어서오세요~!”라면서 주보를 나누어 주셨다. 꼭 식당에 오시는 손님을 맞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못 드리겠는가? 예배 안내가 교회의 기초와 사활을 좌우하는 그렇게 중대한 문제인가? 안내가 없어도 각자 주보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고, 안내를 맡은 사람이 막대기처럼 서서 주보만 내밀어 준다하여 예배를 교회와 예배를 망치는 것도 아니다. 음향장비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교회의 음향장비는 매 주일 스위치를 켰다 껐다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아무리 예배당이 크고 장비가 커도 한 시간 연구하면 나도 어지간히 다룰 수 있다. 어찌 이런 것들과 중보기도의 은사를 비교하겠는가.

중보기도 은사의 성경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이론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의 영혼과 운명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영적인 중재자가 되는 작업이다. 중보기도의 은사가 성경에 없다면, 지금 일어난 중보기도운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헛된 일이 되는 것이다.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삽질에 함께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정말 성경에는 중보기도의 은사와 직책이 신약의 교회에 주어진다는 내용이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엄청난 것들과 관련되었다. 1)종말의 대 부흥과도 상관되었다. 중보기도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말의 대부흥과 영적인 추수이기 때문이다. 2)사탄을 결박하는 특별한 사람들의 능력과도 상관되었다. 중보기도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기도로 사탄을 결박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3)하나님으로부터 지금 현재 음성과 예언이 나타나는 것과도 상관되었다. 유명한 중보기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직접주시는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다. 만일 중보기도의 은사가 성경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 맞다면,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앞세우며 요란스럽게 기도운동을 전개한 그 사람들의 명성과 신앙의 진실성이 자동적으로 몰락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중보기도의 은사가 신약성경에 없다는 사실은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이해하는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b>중보기도의 은사를 천명하는 피터 와그너</b>

우리에게 깊이 다가와 있는 중보기도에 관한 이 많은 이론과 지식들을 어디서부터 왔던 것일까? 나는 피터 와그너의 책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중보기도의 은사가 존재한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세 가지 은사를 은사의 목록에 추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은사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성경의 어떤 구절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교회생활과 사역을 통하여 얻은 경험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은사는 다음과 같다. ‘중보기도의 은사’, ‘귀신추방의 은사’, ‘예배인도의 은사’”(피터 와그너)

“이미 언급한 것처럼, 나는 중보기도의 은사를 말씀하는 성경의 말씀을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중보기도가 성경적인 사역이므로 중보기도의 은사가 존재한다고 가정(postulate)하였고, 그리고 중보기도의 은사가 실제로 나타난다고 확신한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다. 중보기도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특별한 멤버들에게 꾸준히 더욱 오래 기도할 수 있도록, 그리고 보통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게하시는 특별한 능력이다.”(피터 와그너)

성경에는 없지만, 피터 와그너의 경험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중보기도의 은사가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되었다. 사람의 경험과 느낌이 성경을 보충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것이다. 성경이 가라고 하는 곳 까지만 가는 것이 신학의 기본이고 전부인데, 이 사람은 전혀 기본이 없는 신학자였던 것 같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중보기도 이론을 출발시켰다. 이런 현상을 한국에서는 ‘사이비’라고 한다. 그러나 이 당시 피터 와그너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당연히 정설이라고 여겼고, 특히 한국의 목회자들은 그의 책을 읽고, 따르기에 바빴다. 다음은 피터 와그너의 또 다른 책 <Prayer Shield>에 있는 내용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성경의 은사들의 목록에 내가 추가하는 것 두 가지는 귀신추방과 중보기도이다.  이 두 가지를 은사의 목록에 추가하는 주된 이유는 (성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은사들이 실제 사역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피터 와그너)

은사의 목록을 만드는 피터 와그너의 모습을 꼭 엿장수 같다. 어떤 책에서는 중보기도의 은사, 귀신추방의 은사, 예배인도의 은사 세 가지를 더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책에서는 축사의 은사와 중보기도의 은사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성경에서 누락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책에서는 자신에게 사도의 은사가 임한 것을 깨달았다면서 사도의 은사를 추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감히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임으로 성령의 은사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이 성령의 은사들의 목록을 다시 만든다는 것인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일을 쉽게 하지 못한다. 이런 위험스러운 신학자가 앞장서서 만들었던 중보기도 사상을 우리는 쉽게 믿고 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피터 와그너는 무엇으로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임을 판단하였던 것일까? 피터 와그너가 말하는 중보기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긴 시간 동안 기도한다 : 하루 한 시간의 기도는 보통이고 중보기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하루에 두 시간에서 다섯 시간을 기도한다.
∙더욱 강력하게 기도한다.
∙기도하기를 즐기면서 기도 시간을 통하여 개인적인 만족(기쁨)을 얻는다.  
∙기도에 대한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응답을 자주 경험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선명하게 듣는다.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함께 받는다.”(피터 와그너)

너무나도 유치하다. 길게하면 중보기도이고, 짧게하면 보통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력하면 중보기도라고 하였다. 강력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데모하듯이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손바닥을 칼처럼 세워 뭘 자르는 시늉을 하고, 팔 다리를 부르르 떨며 중보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한쪽에서는 “릴릴릴리 ... 엘렐렐레 ...”라고 특이한 소리로 중보기도를 했다. 이런 것이 강력한 중보기도일까? 그런데 왜 진정한 중보기도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강력함(?)이나 손짓이나 특이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을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이 용서 받도록 하나님께 이렇게 중보기도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너무나도 짧았다. 목소리는 매우 여리고 약했다. 피터 와그너에 의하면 이것은 중보기도로 간주될 수 없을 것 같다. 이때 예수님은 어떠한 기쁨도 얻지 못하셨고, 드라마틱한 응답을 전혀 보지 못하고 죽으셨다. 강제로 양 팔을 벌리고 십자가게 못 박히셨기 때문에 어떤 손짓이나 동작도  취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중보기도자로서는 아무런 폼이 나지 않으셨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기도는 중보기도의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피터 와그너가 아무 개념없이 중보기도에 대한 말들을 늘어놓은 것이다. 피터 와그너처럼 중보기도의 은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중보기도는 오직 적법한 중보의 자격을 가진 중보자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기도야 말로 최고의 중보기도였다. 비록 고통으로 신음하시고 기운이 딸려 큰 소리로 기도하시지는 못했고, 죽음이 임박하여 길게 기도하지는 못했어도 그럼에도 가장 강력한 중보기도를 드리신 것이다.


<b>드라마틱한 응답이 자주 나타나는 중보기도</b>

피터 와그너는 중보기도자들에게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응답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중보기도자들이 자주 경험하는 드라마틱한 일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신뢰를 주고 싶지 않다. 하나님의 역사하셨다고 볼 수 있는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응답을 많이 경험하는 신디 제이콥스가 소개하는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그녀의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중보기도운동가들과의 중요한 모임을 가지기 플로리다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밤 2시 경에 불안한 느낌이 들며 잠이 깨었다. 무언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불안한 느낌이 들어 기도하자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운전하여 데이빗이라는 사람의 가족이 타고 오고 있는 자동차가 보였다. 그런데 그 차의 오른 쪽 앞바퀴가 빠져나가려고 하는 중이었다. 곧 큰 사고가 나는 장면이 환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디 제이콥스는 그 자동차의 휠 베어링의 문제를 그 사람이 알고 조치를 취할 때까지 바퀴가 붙어 있도록 몇 시간 동안 부르짖으면서 중보기도하였다고 한다. 신디 제이콥스는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중보기도자를 공격하는 악한 영의 역사라고 하였고, 그 날 밤에 하늘에서는 큰 영적전쟁이 크게 일어났다고 했다.

다음 날 무사히 도착한 그 사람에게 신디 제이콥스는 별 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신디 제이콥스는 자동차의 오른 쪽 앞의 휠 베어링을 검사하여 보라고 권유하였다. 운전자는 즉시 자동차를 몰고 인근의 정비소에 갔고, 교체된 낡은 휠 베어링을 들고 돌아 왔다고 한다. 신디 제이콥스는 그 사람은 망가진 휠 베어링으로 인하여 큰 사고를 당할 상황이었나, 자신의 중보기도로 인해 바퀴가 떨어져 나가지 않고 고속도로를 안전하게 달리도록 기적적으로 지탱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보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응답이라고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 내용을 보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휠 베어링은 바퀴가 차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문제를 야기하는 부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퀴를 차제에 고정시키는 부품은 볼 조인트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파손되지 않는 한 바퀴가 떨어져 나가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바퀴를 최종적으로 자동차에 고정시키는 부품은 우리가 타이어를 갈 때마다 풀었다 잠궜다하는  네 개 또는 다섯 개의 볼트와 너트들이다. 나는 이것이 동시에 부러져서 바퀴가 떨어져 나가는 경우와 볼 조인트가 파손되어 바퀴가 차체에서 분리되는 경우는 보았어도 휠 베어링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는 전문가에게 물어보았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휠 베어링은 이미 고정된 바퀴가 부드럽게 회전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한다. 그래서 이것이 망가지면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불안정한 회전으로 인해 자동차의 직진성향이 없어진다. 그래서 운전자가 문제를 감지하게 되고, 차를 운전하여 정비소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잠들어 있는 중보기도자를 급히 깨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퀴가 빠져나가는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기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정말 환상이 보였다는 정말로 어떤 영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중보기도 장난을 즐기는 미혹하는 귀신이 신디 제이콥스를 가지고 논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아무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중보기도라는 탁류가 일어났던 것이다.  


<b>하나님의 음성, 꿈, 환상과 조합되는 중보기도</b>

피터 와그너는 중보기도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중보기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그들에게 자주 직통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기록된 성경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확신과 깨달음을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음성’이라고 이야기 한다. 만일 하나님이 직접 귀에 들려주시거나, 마음에 글자처럼 새겨주신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우리는 성경외의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치고 ‘이단 스타일’ 또는 ‘이단의 길’로 가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피터 와그너는 “중보기도의 은사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함께 받는다”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직통계시를 말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중보기도의 사상의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고 메시지를 전달받는 예언현상이 그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예언의 은사는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완전성, 최종성, 종결성, 절대성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자신들이 실제로 하나님이 직통으로 주시는 말씀과 음성을 듣는다면, 예언은 성경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사도 운동의 핵심이다. 유명한 신사도 운동가들의 명단을 작성해 보면 대부분의 중보기도 운동가들의 이름이 다 포함된다. 그 이유는 중보기도 운동가들에게서 신사도 운동의 예언 현상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보기도 운동가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꿈, 환상, 음성이 자주 나타나고, 그리고 그 내용들이 그들의 중보기도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반영된다. 자신들에게 임한 계시가 하나님이 뜻과 계획이라고 믿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또 열심히 중보기도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구약 시대에 진정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던 인간 중보자들, 특히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나던 특별계시 현상을 모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꿈과 환상 등으로 뜻과 계획을 계시하였다. 그러면 선지자들은 그 내용을 기록하였고, 때로는 그 내용이 이루어지도록 중보기도하였다. 그리고 구약의 중보자(선지자)들의 이러한 계시와 중보기도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경의 완성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중보기도자들이 보는 꿈과 환상, 등는 음성과 예언은 상상의 산물이거나, 중보기도 장난을 즐기는 미혹하는 귀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내용이 이루어지도록 중보기도를 더욱 열심히 전개한다.
  

<b>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찬탈하는 중보기도</b>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중보기도를 뭐라고 정의하면서 가르칠까? 그들이 설명하는 중보기도에 관한 신학적인 설명을 살펴보면 더욱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은 중보기도에 대해 정의하는 피터 와그너의 말이다.  

“우리는 자주 ‘중보’라는 말을 ‘기도’라는 말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두 단어를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나, 기술적인 용어(technical terms)의 차원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기도는 일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보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on behalf of another)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모든 중보가 기도이지만, 모든 기도가 중보인 것은 아니다.”(피터 와그너)

중보기도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 고통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 특별하게 기도하는 것이 저들의 중보기도이다. 바로 여기 시작부터 큰 문제점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을 위하 기도는 별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라고 하였다.  

“누가 그런 특별한 자격을 가졌지?”
“그 자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가 아닌가?”

우리는 초장에 이렇게 되물었어야 했다. 이 당시 신학계에서 피터 와그너라는 이름은 옛날의 몽골 초원의 징기스칸 같았다. 그가 하는 일은 다 옳은 줄로 알고 따라하느라 바쁘기만 했었다. 피터 와그너 같은 사람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중보기도라고 하니 그런 줄로만 알고 받아드렸던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그런 식으로 많은 이론들을 개발하여 세계 교회에 퍼뜨렸었다.  

그러나 기도에 관한 신약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뒤져도 이런 개념의 기도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특별하게 기도한다는 사상의 근거가 될 말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신약 성경의 말씀을 보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for everyone)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for kings and all those in authority)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어떤 사람을 대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 나의 대리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향후 그 사람에게 일어날 일들은 모두 내가 어찌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어떤 다른 사람의 신앙과 영혼과 운명이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달렸다는 개념, 이것이 중보기도 사상의 핵심이다. 중보기도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중보기도에 따라서 그 대상의 상황과 운명이 바뀐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이런 사상이 나타나는가? 성경의 어디에도 이러한 개념의 중보기도에 대한 말씀이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있고, 남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명령 받았다.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여 그들의 운명이 나에게 달린 것은 아니다. 내 능력으로, 내 맘대로 다른 사람이 잘되게 할 확실한 권능이 나에게는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도록 요구할 적법한 근거도 없다. 그러한 일을 하실 분이 오직 한 분 계신다.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간다. 그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신(대변)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한 분(대변인, 대변자, 중보자)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 앞에 나간다. 그가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중보기도 운동가들은 변개하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대변하며) 하나님 앞을 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변호하시는 대변인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의 기도는 무가치하고 허사이다. 백날을 기도해도 하나님은 콧방귀도 안 뀌신다. 재판에 출두하는 사람은 없는 돈을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입장을 공교하게 대변하는 전문가(변호사)를 고용해야 한다. 홀로 자신의 힘으로만 재판을 받는 것과 법적인 대변인을 고용하여 재판에 임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생겼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도에 힘을 싫어주시고, 기도하는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여 줄 때에 더욱 공감하시고 응답하신다. 우리들의 기도가 매우 부족하고 무능할지라도 적법한 대변자이신 예수께서 함께 해 주시면 힘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도 나약하고 부족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를 대변하시는 예수께서 하나님께 더불어 말해주기 때문에 큰 능력과 응답이 나타나는 것이다.

중보기도 운동가들은 이 진리를 모조리 변개시켜 자신들의 영광만 높였다. 자신들이 우리들을 대변하면서 기도한다고 하였다. 과연 신디 제이콥스에게 하나님 앞에서 나를 대신하여(대변하며) 기도할 무슨 자격이 있다는 것인가? 여러 면에서 지긋 지긋한 이단 스타일이 드러난 피터 와그너가 나를 무슨 근거로 대신하여 기도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참된 중보자이시고 완전한 대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b>기도할 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라!</b>

피터 와그너의 절친한 친구이며 중보기도운동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더치 쉬츠는 중보기도 정의를 보자. 그의 정의는 더욱 더 위험스럽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중보하다’(intercede)는 ‘사이로 들어가거나 통과하다’, ‘서로 다르거나 다투는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다’, ‘조정하거나 중재하다’, ‘조정’을 의미한다. 그 사전을 찾아보면 ‘조정하다’(mediate)는 ‘양극단 사이에서 양자 모두의 친구로서 당사자들을 중재한다’, ‘화해시킬 목적으로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협상하다’, ‘화평을 조정하다’, ‘중보’의 뜻으로 나타난다. 이 두 용어는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들과 전체적으로 의미가 비슷하다는 점을 주목하라. 또한 한 용어가 다른 용어를 정의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에도 주목하라. 즉, 조정(mediate)이 중보(intercede)를 정의하고, 중보가 조정을 정의하고 있다.”

기도에 대해 가장 많은 내용을 가르친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이러한 중보기도에 대해서 가르친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할 것은 수 없이 요청했지만, 어디에도 이런 중보기도 사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살후 1:1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살후 3:1)

바울 자신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위해 ‘중보’(intercede)하거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과 계획을 ‘조정’(mediate)하는 개념의 기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기도할 때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라고만 했다. 에베소서 1장 17절부터 19절의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대신하여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중재하는 내용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개역개정)

바울 사도도 기도하는 한 사람의 성도로서 사랑하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극 공감하시고 더불어 하나님께 말씀하여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처럼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예수께서 우리 기도에 동참하고 보증하여 주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 우리의 기도가 능력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의 기도는 무가치한 기도가 되어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도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원리이다.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없으면 기도가 온전하게 성립되지 못한다. 그런데 중보기도 운동가들은 이 성경적인 기도의 원리를 변개시킨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다만 우리가 기도 할 때에 다른 사람의 사정과 형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말하라고만 하였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원리를 보여주는 다음의 성경 말씀을 주의깊게 보기 바란다.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엡 1:16)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살전 1:2)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몬 1:4)


<b>승리를 집행하는 중보기도</b>

근본적으로 그릇된 중보기도 사상은 이 정도로 멈추지 않고 더 무서운 사상을 교회 속으로 끌어들였다. 중보기도로 크고 위대한 역사를 마음대로 일으킨다는 망상증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다. 모든 것이 중보기도로 가능하고, 중보기도가 만능이라고 여기는 괴이한 병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치 자신들이 난세에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적인 사사들처럼, 기도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북한구원’, ‘낙태반대’, ‘동성애 추방’, ‘대 부흥’, ‘사탄결박’, ‘이스라엘 회복’, ‘교회들을 억압하는 종교의 영 타파’, ‘도시를 결박하는 사탄의 진지를 파괴’ ... 다 가능하다고 하였다. 기도의 뒤 끝을 조금 바꾸어서 ‘찌어다!’라고 해 버리면 다 되는 것처럼 엄청나게 유난을 떨었다. ‘중보기도 세미나’, ‘중보기도학교’, ‘중보기도 단기선교’ ... 이런 것을 도처에서 수시로 열면서 영웅적인 기도의 사사들을 세웠다. 내가 괜히 없는 일을 만들어서 중보기도 운동을 모함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어떠한 이론으로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사사들처럼 직접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쳤는지 보자. 다음은 더치 쉬츠의 책에 서평을 쓰신 차영근 목사의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서 이 땅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결정 내리셨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기도와 믿음을 통해 이 땅에서 그 결정을 시행하실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을 시행할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보기도로서 세상을 조정해 가신다. 그리고 더 많은 중보기도가 있을수록 세상은 더 나은 모습이 될 것이며, 악에 대항할 힘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차영근)

“사단과 그의 왕국은 이미 법적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그 분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몫을 행할 때이다. 즉 최종 승리의 집행은 우리의 몫이라는 말이다”(차영근)

“즉,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루어진 일을 중재하고 조정하고 분배하고 집행하고 성취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는 말이다. 그 몫이 바로 중보기도이고, 그 중보기도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삶의 생생한 체험을 통하여 증명해 보이고 있다.”(차영근)

중보기도 이론은 예수를 높이는 것 같으나 교묘하게 예수를 낮춘다. 예수를 낮추는 만큼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승리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나, 지금 현실에서 승리가 집행되게 하는 사람은 중보기도자이기 때문이다. 중보기도자들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신 승리는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다. 댐에 물이가득 넘실거려도 수문을 열지 않으면 그 아래의 논밭의 작물을 말라 죽는다는 논리이다. 예수의 능력이 아무리 많아도 중보기도자들이 그것을 끌어다 교회와 사람들에게 분배해야만 우리 것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보기도이고,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에게 의존해야 하고, 그들이 잘 하기를 바라셔야만 한다.  기도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을 이렇게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렇께 엄청난 왜곡을 생산해 버렸다. 그 영리한 사탄이 이루어낸 작품인 것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최종적인 집행자가 되신 분입니다. 인류에 대한 죄의 권세를 물리친 십자가상에서의 그분의 죽음은 인간사에서 하나님의 중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분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 예수라는 그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받게 된 것입니다.”(신디 제이콥스)

“중보기도는 몸 된 교회를 통한 예수님의 사역의 확장이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세상을 그 분과 화목시키기도 하고, 사단과 인간 사이에 서서 갈보리의 승리를 집행하기도 한다. 여 하여 분재하고 가게 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이 땅에서 자신을 대표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예수님이었으며,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 사람은 바로 교회인 우리(중보기도자)이다.”(더치 쉬츠)

피터 와그너도 동일하게 가르친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의 책에서도 중보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집행한다는 사상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그의 책 <Prayer Shield>의 26페이지를 보면 택사스의 히어포드(Hereford)라는 도시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하였으나 그의 설교를 듣고 결신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고민하였던 래리 리(Lary Lea) 목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염려하고 있을 때에 두 여인이 다가와서 “걱정하세 마십시오! 우리가 여덟 시간 동안 목사님을 위해 (중보)기도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그 도시에서의 전도집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결신하였다. 그런데 후에 래리 리 목사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피터 와그너는 소개하였다.

“아들아! 너는 그 부흥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너의 설교를 통하여 구원 받은 것은 어떤 사람들이 (중보)기도로 희생(대가)을 치루었기 때문이었다.”

“기도로 희생을 치르다”라는 표현도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얻은 승리를 오늘의 교회 속으로 이끌어 온다는 끗이다. 다른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집행하고, 분배하고, 조정한다는 이론과 동일한 뜻이다.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권능과 승리를 이 땅에서 집행하고 분배하고 조정한다는 이론을 세우기 위해 그들은 열심히 성경말씀을 도용했다. 오늘 날 있지도 않은 중보기도자들을 세우고서, 장차 오실 참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에 관한 성경 구절을 부지런히 연결시켰다.


<b>그릇되게 이용되는 성경 말씀들</b>

피터 와그너와 중보기도 운동가들에게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었던 성경 내용은 출애굽기 17장의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의 상황이다. 백성들과 함께 전쟁에 임하여 싸우는 장수는 여호수아였다. 그러나 그 전쟁의 승리를 결정하고 견인하였던 사람은 산 위에서 두 손을 들고 중보기도하였던 모세였다. 그들은 자주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강조하는 내용은 눈에 드러나는 사역자들의 승리는 뒤에서 중보기도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나타난 작품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중보기도로 하나님의 승리를 집행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처럼 보이는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얻는 승리는 자신들의 중보기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러한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내가 중보기도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내가 중보기도 잘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시작한 그 구원과 승리를 지금 이 땅에서 집행하고 사람들에게 고루고루 날라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빛이 나게 됩니다!”

제대로 중보기도 사상에 빠지면 이렇게 된다.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현실 속에서 집행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와 망상이 잘 퍼지도록 많은 구약의 성경구절들이 많이 도용되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임시로 일하였던 인간 중보자들에 관한 성경의 말씀들이 그릇되게 적용되었다. 이 내막을 알지 못하는 평신도들은 성경이 지금의 중보기도 사상을 용인하고 있고, 중보기도자들에게는 구약의 모세, 다니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나타나는 그런 사례들을 찾아보았다. 그녀의 책에서 중보기도의 근거로 가장 빈번하게 제시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으니나”(겔 22:30-31).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 당시에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할 인간 중보(중재)사역자들이 오히려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있음을 통탄하시면 이 말씀을 하셨다. 신실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더 이상은 반복될 필요가 없는 말씀이다. 그런데 중보기도 운동가들은 이 말씀을 지금의 교회에 직접 적용하면서 자신들의 거짓된 중보기도 사상을 선전하면서 자신들을 영웅적인 기도사사로 만들어 간다. 신디 제이콥스도 이 구절을 자주 중보기도 이론을 펼치기 위해서 활용하고 있었다. 26, 40, 42, 68,74,76, 78 페이지에서 이 성경말씀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중보기도 이론을 기술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게 하시게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6,7)

이 내용은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재건할 때 성벽에 세웠던 파숫꾼과 그 당시에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쉬지 않고 가르치도록 세우심을 받은 영적 지도자들의 사명을 비교하면서,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도록 촉구하신 말씀이다. 물론 오늘 날에 말씀을 전파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신디 제이콥스는 지금의 중보기도 운동의 이론의 근거로 활용하였다. 그녀의 책 78 페이지를 보면 이 말씀이 지금의 중보기도자들에게 직접 적용되는 말씀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60, 62 페이지에는 이사야 58장 16절의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라는 말씀도 지금의 중보기도자들의 활약상을 설명하는 성경적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b>추방되어야 할 중보기도운동</b>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중보기도에 관한 사상과 이론들은 근본적으로 성경적이지 못하다. 어떤 내용들은 심각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파괴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면서 단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중보기도 운동을 수용하였다. 더 많이 기도하게 되는 유익도 있었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 등의 위험스러운 사상과 일치하는 중보기도 운동가들이 이론과 영성을 분별하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에 많은 불건전한 사상이 들어오고 말았다. 이제라도 이 사실을 발견하고서 중보기도운동에 관한 모든 이론들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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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방언,성령춤도 주는 귀신들 2012-01-03 9294
15 손기철 장로의 기름부음의 정체 2011-12-23 5577
14 신사도운동의 거짓부흥 2011-11-22 6060
13 손기철 장로의 신사도 운동 2011-11-22 6071
12 IHOP의 끝이 보인다! 2011-06-03 7937
11 IHOP의 24/365 중보예배 2010-12-15 10170
10 IHOP의 선지자와 예언 2010-12-02 5801
9 IHOP의 사도적 리더쉽 2010-12-02 7904
8 신사도 운동의 빗나가는 기도 2010-06-05 6630
7 신사도 운동의 사도와 선지자 2010-05-12 6551
6 신사도 운동의 쓰러뜨림 2010-02-21 6801
5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2010-02-10 8932
4 신사도 운동의 Back To Jerusalem 2010-01-30 8187
3 신사도 운동의 예언 2009-12-14 6376
2 신사도운동의 회개 2009-12-03 6228
1 신사도 운동의 금이빨 2009-11-24 1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