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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 사상은 비성경적

조회 수 7563 추천 수 35 2012.12.10 04:29:18
<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color:">뉴스앤조이에서도 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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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운동이 교회에 미친 악영향이 크다. 이제는 중보기도라는 용어 자체가 비성경적임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중보기도에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나 개념으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고, 남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기도를 다 하되 중보라는 개념과 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보자, 중보기도팀, 중보기도회, 중보기도운동 ... 이 모든 용어도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음에 해되는 말이기 때문이고, 우리의 신앙에도 오해와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보기도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가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장 합동은 이미 오래 전에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합동 교단의 교회들에게서도 여전히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미 친숙한 용어로 자리 잡았으므로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타인을 위한 기도라는 의미를 분명하여 계속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다.

그러나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수용할 수는 없다. 신앙에 해를 미치는 나쁜 사상과 운동이 일어 날 때에는 꼭 성경적이지 못한 용어가 등장하고, 그 용어를 매개로 하여 비성경적인 사상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 사상을 기반으로 장난하는 사탄의 미혹이 밀려온다. ‘성령운동’이라는 말과 ‘기름부음’이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b>성령운동?</b>

‘성령운동’이라는 용어는 과연 성경적일까? 이 말 속에 담겨진 비성경적인 의미를 매우 심각하다. 이 말 속에 담겨진 비성경적인 내용을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TV를 보면 인도에는 코브라 쑈를 사람들에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피리를 불며 코브라를 조종한다. 코브라가 담긴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피리를 불면 뱀이 피리 소리를 듣고서 따라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과연 정말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보기에는 뱀과 사람이 피리 소리를 통하여 교감을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심하게 말해 성령운동이라는 말 속에 이런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성령 하나님을 일하시게 만든다고 하기 때문이다. 매우 하나님을 모욕하는 망령된 말이고 개념이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시다. 본질적으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을 하나님 바로 ‘그분’으로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운동하게 만들겠는가? 성부 하나님을 지극히 경배하는 그 신앙의 자세로 성령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선한 취지일지라도 성령님을 우리가 부리거나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성도들은 성령을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 수준으로 이해한다. 또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어떠한 힘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에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기운이나 힘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그릇된 바탕에서 성령운동이라는 개념이 일어났다.  

그릇된 성령운동 개념은 저질적인 이방종교로부터 영향받았다고 여겨진다. 고대의 가나안 주민들은 그들의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농경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두 신의 사랑의 결실로 노사가 풍요롭게 결실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사가 잘 되어 자신들의 삶이 윤택하기 위해서는 남성 신 바알과 여성 신 아세라가 지속적으로 사랑을 나우어야 했다. 이러한 교리에 인간의 열성이 더해졌다. 두 신들을 즐거이 사랑하도록 자극하는 종교의식을 개발한 것이다. 자신들의 신을 경배하는 종교의식으로서 진행되는 일이었으니 아무 죄의식이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도말하신 것은 이러한 죄악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점염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성령이 일하게 하여 은혜를 얻어낸 다는 것이 곧 성령운동이다.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모티브와 아주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만일 성령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요즘 성령 하나님이 게을러지셨는가?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따돌림 당하심으로 우울증에 걸리기라도 하셨는가? 그래서 성령이 일하시도록 격려해 드린다는 것인가? 왜 사람이 성령을 운동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개념을 가지고 성령운동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대체 성령운동이라는 미명하게 하는 일들은 무엇인가?

결국 성령운동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가만히 보니 방언이라는 소리를 나오게 만드는 일이 가장 흔한 일이다. 예언이 나오도록 도와주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이 음성을 주시면 안 들으려고 해도 절로 들릴 것이다. 왜 듣는 연습을 해야 하는가. 만일 방언과 예언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신적인 현상이라면 아무도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을 위해 사람이 운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민수기를 읽어보라(민 22:28). 어리석인 인간 바람을 책망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말하는 발성기관이 없는 짐승을 통하여 그 인간에게 말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그 현상이 예언이다. 말 못하는 짐승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예언한다. 방언도 하나님이 하시게 하면 누구인들 못하겠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길가의 돌들이 일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눅 19:40).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죽은 사람도 당장 살아난다(눅 7:14). 하나님은 이러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인간이 멍석을 펴고, 분위기를 조성하고, 여건을 만드는 성령운동이라는 것을 왜 해야 하는가? 이러한 시도를 끈질기게 하여서 방언이니 예언이니 하는 것들이 술술 나오게 하고, 무슨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치자. 그것이 과연 성령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라고 볼 수 있겠는가? 미혹하는 영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 일하기 좋은 여건이 조성하는데 성령운동이라는 영어와 개념이 크게 작용했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다음은 방언이 나오도록 성령운동을 벌이는 실제 장면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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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기름부음?</b>

사탄이 비성경적인 용어와 개념을 만들어서 교회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기름부음’이라는 것이다.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지난 30년간 세계교회를 가장 강력하게 드라이브하였던 대표적인 비성경적인 용어이다. 대체 기름부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누구도 이것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기름부음이 뭔지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기름부음 사상을 믿고 추구하고, 심지어 기름부음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홍보되는 사람 그 자신도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뉴욕의 맨하탄에 타임 스퀘어 교회(Time Square Church)라는 곳이 있다. 2011년 4월에 교통사고를 만나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윌커슨(David Willkerson) 목사가 오랫동안 담임하였던 교회이다. 그는 환상을 보고서 그 내용을 글과 설교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예언사역자였다. 환상과 예언을 믿고 중시했다는 것은 그 자신이 신사도 운동가였거나, 최소한 신사도 운동과 연관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도 신사도 운동의 핵심 사상인 기름부음을 당연시하였다. 인터넷 상에서 그가 했던 “하나님의 기름부음”이라는 설교 영상을 보았다. 과연 그가 기름부음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여 들어보았다.  

“신선한 기름부음을 받기 위한 대가지불에 관해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기름부음에 관한 신학적 정의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구약으로 돌아가서 구약의 기름부음의 정의에 대해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신약의 기름부음과 구약의 기름부음은 다른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는 놀랍게도 기름부음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로서 기름부음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였다. 기름부음에 대해서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기름부에 대해 설교한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쨌건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실이 신학적으로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내용이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바른 노선을 견지하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연구하던지, 아니면 혼자서 바르게 독학하던지 간에 신학을 연구해야만 한다.  

이미 여러 번의 기회를 통하여 구약 시대의 기름부음의 의미를 설명했다.
1)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
2)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직분),
3)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성령의 임재를 상징
이것이 구약 시대의 기름부음의 의미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신약 교회와 성도에게 임하신 성령 하나님으로 다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기름을 붓는 실제 예식이 없다. 그리고 성도가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서 인격적이며 친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음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신약의 저자(요일 2:20, 2:27)가 기름 부음이 성도에게 있다고 표현하였을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의미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존 윔버를 비롯한 빈야드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집회에서 나타나는 괴이한 현상들이 성령의 제 3의 물결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성령세례라고 주장하면서, 그때 나타는 현상들이 곧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하였다. 이 기름부음 사상을 한국 교회에 널리 홍보한 사람은 온누리 교회의 손기철 장로이다. 그는 성령의 제 3의 물결사상, 즉 신사도 운동 사상의 영향을 받아「기름부으심」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을 보면 손기철 장로도 기름부음을 신사도 운동가들과 동일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것처럼 거룩하게 구별되고 하나님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때의 상태를 ‘기름부으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또한 성령세례는 단 한번 받는 것인데 기름부으심도 한 번만 받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번 받아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같이 한 번만 받지만 기름부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넓고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 여러 번 받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도 더 큰 기름부으심을 사모하고 있습니다.”(손기철, 기름부으심, p.28)

손기철 장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이 나타나는 현상이 기름부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름부으심을 한번 받는 것이 아니고 수 없이 반복하여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 것처럼, 신약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아 성도에게 보내신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기름부음’이라고 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그러므로 굳이 기름부음과 우리의 신앙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모든 성도들은 단 한 번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다. 이후에 더 받기 위해 기르부음이 흐르는 어떤 집회나 장소를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이후에는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아 성령의 성품,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역사가 진행된다. 그것은 기름부음의 반복이 아니고 성령의충만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가들은 기름 부음이 여러 번 수 없이 반복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들의 집회에서는 사람들이 늘 쓰러지고, 히죽거림,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이상한 방언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여 뛰고 구르고, 금이빨, 금가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귀신이 장난하는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안다고 한들 뒤 늦게 사람들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귀신의 종이 되었음을 밝힐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기름 부음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더 많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

성경에 기술된 방언의 특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괴이한 소리를 일으키면서 방언열풍을 몰고 다시는 사람이 있다. 김우현 PD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단시간에 방언이 나오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동시에 수 십 명에게서 그 소리가 나오게도 한다. 그는 그 소리를 ‘하늘의 언어’라고 미화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나는 많은 사람의 신앙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김우현 씨가 쓴 「하늘의 언어」라는 책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비성경적인 내용이 나올 때마다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다. 그런데 밑줄이 한 번도 그어지지 넘어가는 페이지가 거의 없었다. 성도들을 오해와 혼란에 빠지게 하는 방언에 대한 거지같은 소리들이 수 없이 기술되고 있었다. 역시나 김우현 씨의 책에서도 ‘기름부음’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총 247페이지로 구성된 이 책의 110 페이지까지 기름부음이라는 용어가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세면서 읽었다. 그 이후에는 세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110페이지까지 기름부음이라는 말은 약 15회 등장한다. 다시 공들여 세어보면 한두 개 늘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반대로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정확하게 세었는지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문제는 김우현 씨가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사상을 믿고 심취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귀신의 농간에 빠져 허우적이고 있다는 것이다.  

기름 부음을 강조하는 신사도 운동가들의 집회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이 방언이라는 괴이한 소리 현상이다. 그런 방언이라는 소리들과 기름부음 개념을 믿는 김우현 씨에게서 더 많이 나오는 방언이라는 소리는 어떻게 다를까? 그의 책을 보니 김우현 씨에게서 대량의 방언 현상이 나타나게 된 최초의 계기도 바로 기름부음이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김우현 씨는 수년 전 뉴욕을 방문하였다. 그때 맨하탄의 타임 스퀘어 교회(Time Square Church)의 중보기도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교회는 신사도 운동 교회들에게서 자주 소개되는 교회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뉴욕을 방문한 김에 이 교회에 까지 갔다고 왔다고 하였다. 그 분들도 신사도 운동 성향이 있는 분들이다.

이 교회를 오랫동안 담임하였던 데이비드 윌커슨(David Willkerson) 목사는 자주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책과 이 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통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그가 보았던 환상은 주로 어떤 나라가 곧 부도선언을 하여 굉장한 혼란이 일어난다는 내용, 극심한 경제적인 위기로 인해 미국의 모든 은행이 제 기능을 상실한다는 내용, 큰 무질서와 혼란이 일어나 무법천지의 생지옥으로 변하는 국가적인 혼란이 일어난다는 내용, 사람들이 백화점에 난입하여 닥치는 대로 훔치고 파괴하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았다는 내용 등이 주를 이루었다. 지금도 인터넷 검색창에서 데이비드 윌커슨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그가 했던 예언적인 설교의 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환상을 보여주시고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주신다는 것은 신사도 운동의 핵심적인 내용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직접적인 메시지가 임한다는 예언사상이다.  뉴욕을 방문했던 김우현 씨는 대체 왜 이곳에 가서 기도하고자 했을까? 신사도 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도 운동을 경계하는 사람들은 혹 자료를 얻기 위해 갈 수는 있어도 기도하기 위해 여기를 찾아가지는 않는다. 김우현 씨가 여기에 가서 무엇을 얻고자 기도하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김우현 씨는 하나님께 강력한 기름 부음을 달라고 기도하고자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응답을 주셨다고 한다. 그의 책 17 페이지에 그때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주신 응답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동석이에게 방언을 받도록 기도해 주어라!”

그때 동석이라는 분이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에게 방언을 나오도록 가서 기도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김우현 씨는 순종하여 동석이라는 분에게서 방언이 나오도록 기도하였고, 즉시로 방언이 나타났다. 이것이 김우현의 방언행전의 시작이었다. 신사도 운동 교회에 가서 신사도 운동의 핵심 사상인 기름부음을 구하였는데, 하나님은 그에게 방언운동을 시작시키신 것이다. 즉 김우현 씨의 방언은 신사도 운동의 흔한 기름부음으로 포장되는 귀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김우현의 방언행전의 제 1장은 이날 이렇게 막이 올랐다.  

아무도 그 내용을 성경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는 이렇게 이상하게 쓰여지면서 이상한 기독교를 만들어갔다. 한 두 사람이 기름부음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싸이라는 가수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온 세상에 퍼지더니 백악관에 가서도 그 노래를 불었다고 한다. 기름부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널리 퍼졌다. 큰 영향을 미치는 유명한 지도자들까지도 기름부음이라는 비성경적인 개념을 전파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하용조 목사가 손기철 장로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치유집회를 인도하고 있다면서, 사람들에게 그의 집회에 참석하여 방언과 예언 등을 경험해 보라고 홍보해주는 영상을 보았다.

하용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손기철 장로를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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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손기철 장로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종을 창조과학회를 통하여 오랫동안 지적훈련을 시키셨고, 건국대학교 학장으로서 학문에서 탁월한 성취를 하신 분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분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병 고치는 치유사역과 내적치유 사역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3,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 주 월요일마다 모여서 말씀을 듣고,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기적과 성령체험을 하는 ...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이 분에게서 배우고자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역사가 손기철 장로님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손기철 장로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직접 목격하고 ... 이번에 얼바인 온누리교회에서 손기철 장로님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 받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고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흥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행전적인 사건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손기철 장로님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셔서 큰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하용조)
다.  

지금 이 내용을 말하는 것은 돌아가신 고인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사탄이 기독교를 더럽히는데 크게 쓰여진 기름부음이라는 비성경적인 개념에 하용조 목사까지도 동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하용조 목사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서 있는 온누리교회의 성도들과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이런 불건전한 사상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b>중보기도?</b>

‘중보기도’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운동, 기름부음이라는 말이 이미 우리에게 너무도 밀착되어 있는 것처럼, 중보기도라는 말도 우리에게 매우 깊이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 중보기도가 그릇된 말이며 비성경적인 사상이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이미 오래 전부터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운동, 기름부음이라는 모호한 말을 용납하면서 겪어야 했던 심각한 손해를 생각해야 한다. 중보기도라는 말과 개념의 부작용도 그에 못지않다. 기도하는데 왜 혼란과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인가? 그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도해도 성경적이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에 사탄의 미혹이 일어난다. 기도는 중요하고도 영적으로 예민한 영역이기 때문에 그릇된 기도는 악한 영들이 좋아는 대표적인 미혹의 통로이다. 중보기도 사상과 운동을 통해 그러한 부작용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피터 와그너와 신디 제이콥스, 마이크 비클 등의 미국 사람들과 엘리야 기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김종필 목사, 인터콥의 이지애 총무, 서울의 큰믿음교회의 중보기도학교(교장 김옥경 목사) 등의 신앙을 연구해 보기 바란다. 이들은 모두 심각한 신사도 운동가들이다. 중보기도 사상은 신앙이 크게 변질된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b>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중보기도</b>

왜 중보기도 사상을 확실하게 가진 사람들은 그릇된 운동의 거장들이 되었을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라는 말이다. 십자가가 완전한 구원을 준다고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이 완벽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보기도의 자격이 있고, 중보기를 해야 한다면,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방법인 십자가의 효력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중보기도에 대한 내용이 전무하다. 신약의 교회에는 중보기도의 사명, 중보기도의 은사, 중보기도의 직분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디모데전서 2:1절의 ‘도고’를 중보기도라 오해하고서 신약성경에도 중보기도에 대한 명령이 있다고 우긴다. 그러나 도고라는 단어(헬라어 ‘엔튝시스’)를 일부 영어성경들이 intercession으로 번역하고 또 우리 말 성경이 ‘중보’라고 번역하여 나타나는 오해일 뿐이다. 그 단어는 ‘기도’라고 번역되면 좋을 단어이다.  

우리가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정리해 보자.

첫째로,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느낌을 따라 임으로 믿으면 안 된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사명을 완수하심으로 완전한 구원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중보기도라는 말과 사상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기독교의 구원을 위협하는 행위이다. 사탄이 중보기도 사상으로 일하는 자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중보기도 개념 그 자체가 완전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 유일성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공동구속자’(Co-Redeemer), ‘공동중보자’(Co-Mediator)라고도 한다. 마리아가 일반 사람들에게 은혜와 구원이 임하도록 하나님께 중보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그 외에도 교황, 신부들, 먼저 죽은 위대한 성인들도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b>신.구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중보기도 개념</b>  

이제는 중보기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은 구약성경이다. 구약시대에는 인간 중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주시라고 요청하고 중재하는 중보기도를 드렸다. 매 시대마다 존재했던 인간 중보자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일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중재하면서 요청드리는 중보기도를 드렸다. 지금 널리 확산되어버린 중보기도 개념은 이 사실을 단순하게 이해하는데서 시작되었다.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 중보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 일반 백성들을 직접 대면하시면서 일하시지 않았다. 모든 시대마다 세우신 중보자들이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셨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들이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에는 큰 부흥과 은혜가 있었고, 그들이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을 때에는 재앙과 고통이 많았다.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이 감당했었던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아 전달하여 백성들이 무지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의 악한 죄를 깨닫게 했다. 이러한 중보사역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 등의 선지자들이다.

둘째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앞장서 싸움으로 해치기 위해 침입하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이러한 중보사역을 감당했던 자들이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들이었다. 또한 왕정이 수립되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사사들도 같을 일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셋째로, 죄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위해 동물의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사죄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선물하였다. 그들은 피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하였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평하게 만들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제사장들이 이러한 중보사역을 감당했다.  

구약 시대에 인간 중보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죄악에 빠진 인간과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교통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구원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멸하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 은혜, 생명주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 부득이 필요한 조치를 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인간 중보자들을 세우시는 것이었고, 그들로 하여금 쉬지 않고 중보하는 기도를 올리게 만드셨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지”(삼상 12:23)

중보자였던 사무엘 선지자는 자신의 중보기도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기도해야 한다는 거룩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중보기도하지 못하여 이스라엘에 은혜가 그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수라 할 정도의 작은 일이 아니고 그 결과가 너무나도 심각한 죄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겔 22:30)

중보기도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자주 인용한다. 오늘 날에도 중보기도를 시행하여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일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중보기도자들이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가당치 않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렇게 이용될 내용이 아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릴 성물을 더럽히고, 지도자들이 불의한 이득을 위해 연약한 백성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참된 예언의 말씀을 받아 전해야 할 선지자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 거짓 복술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즉, 그 시대의 인간 중보자들이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인간 중보자들이 다 감당하지 못한 그 일을 완전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다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이전에 인간 중보자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지금도 중보기도자들이 부족하여 은혜가 넘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다.


<b>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b>

구약 시대의 인간 중보자들의 중보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그들이 위대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죄악에 빠져 망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전히 중보하여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는 이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백성들의 죽고 망하도록 방치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미리 대행할 모세와 같은 인간 중보자들을 세우셨다. 모세와 같은 인간 중보자의 중보기도를 기꺼이 받으시고 응답하신 것은 장차 오실 완전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모세가 그 자이에 섰기 때문이다.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은 부족한 죄인들이었다.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을 수 없었다. 모세는 여러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매우 성공적인 중보사역을 감당하여 이스라엘에게 많은 은혜와 복을 누리게 했다. 그러나 한 순간 자신의 혈기를 이기지 못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중대한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민 20:12).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그릇 행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하는 중보자의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하였음을 책망하셨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우리게 하리라 하시더니”(행 13:22)

구약의 왕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왕이었던 다윗도 장차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한 인간 중보자였다. 일찍부터 다윗의 성품과 믿음을 아신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다. 다윗은 탁월한 믿음을 가진 다윗의 통하여 많은 일들을 이루셨다. 그러나 다윗도 치명적인 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철저하게 실패하는 다윗을 보면 하나님나라를 인간 중보자들에게 맡긴다는 것이 위험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죄인들에게 은혜주시기 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러한 위험과 모험을 감수하셨던 것이다.


<b>선지자, 왕, 제사장의 중보직임을 완수하신 예수 그리스도</b>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이 온전한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욱 생명의 능력이 동반되는 권세있는 말씀을 무지한 백성들에게 전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크게 은혜를 입었으나, 사탄에게 속한 사람들은 분개하며 이를 갈았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도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전파되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게 속한 백성과 사탄에게 속한 악한 사람들이 확연하게 구별되었던 것은 예수께서 참 선지자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진리와 영생의 말씀을 전하는 최종적인 ‘그 선지자’로 오셨으므로 사탄에 속한 악한 자들의 대적과 핍박이 더욱 극심하였다.

“그 사람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원수 마귀를 물리치셨다.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라도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의 동물의 제사를 필요하지 않게 하셨고,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구약의 인간 제사장이 역할을 친히 죄 없으신 자신의 몸으로 완전하게 이루셨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인간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며 중보하는 기도를 올렸던 구약의 세 종류의 중보의 직분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그 핵심적인 중보의 사역이었다. 그리고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중보자는 이제 천상에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간구하신다. 중보자 예수께서 구원하신 우리를 영원히 보존하시기 위해 친히 쉬지 않고 중보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심이라”(히 7:25)


<b>확실하게 성취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b>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하는 기도를 올리면 100% 확실하게 그 결과가 나타난다. 예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에게도 엄청난 마귀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그러나 아무도 해를 당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탄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일 정도로 무섭게 공격했음에도 단 한 명의 제자도 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중보자로서 그들이 보존되기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내가 내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1-15)

그 날 밤 베드로도 사탄의 공격을 받아 믿음이 파선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다. 마귀는 그를 죽여버리려고 했다. 가룟 유다처럼 스스로 파멸되어 다시는 믿음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생명과 믿음은 보존되었다. 비록 두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세 번째에는 자신과 예수가 무관하다고 웅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주를 저주하였다. 이러한 사람이 다시 빠른 시간에 제기하여 가장 중심적인 사도가 되고,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마귀의 공격이 시작 될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해 이미 중보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셨기 때문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눅 22:31,32)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이처럼 그 결과가 확실하다. 그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완벽하게 중재하는 자격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100% 완전한 하나님, 100% 완전한 인간으로서 십자가를 지셨고, 하나님과 사람 양편의 입장을 100% 만족시키시기 때문이다. 인간을 대표하여 죽으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시는 조건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은혜를 중재하면서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반석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완전한 중보자가 되신 예수를 통하여 얻은 구원이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그 분이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도 천상에서 지속되고 있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확실하게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다시 마귀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그러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모임인 신약의 교회에는 인간의 중보기도가 없는 것이다. 중보기도라는 말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혜택을 누리면서 장성한 믿음을 가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만 할 뿐이다.  


<b>인간의 중보기도의 도움 없이 직접 기도하는 신약의 성도</b>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와 관련된 개념이나 사상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단지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부르는 용어일 뿐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말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뜻으로 말을 했을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저런 뜻으로 이해하면 큰 오해가 생기다. 그래서 입은 비뚤어졌을지라도 말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중보기도라는 말도 충분히 그럴 위험성이 있다. 이미 중보기도라는 단순한 용어의 차원을 넘어 중보기도운동으로 발전되어 버렸다. 그리고 별의별 사이비 개념들이 그 안에서 자리를 잡았고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확산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연합기도’, ‘합심기도’ ... 등의 적절한 대체용어가 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계속 고집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그냥 기도하자고 하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보기도하자고 하면, 다른 사람보다 앞서 이끌어가는 영적인 선구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냥 기도한다고 하면 시시한 느낌이 드나, 중보기도한다고 하면 남들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특수요원 또는 지휘관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더욱 더 중보기도라는 말은 사라져야만 한다.

중보기도라는 말이 비성경적이라고 지적만 하면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중보기도라는 용어와 사상을 추방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바른 기도에 대한 이해와 사상을 가르쳐야 한다.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이미 엄청난 기도의 특권과 은혜가 보장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하나님께 직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기도하지 못했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기도하기는커녕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려워서 떨기만 했다.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7,18)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간구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지 못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죄가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불완전한 인간 중보자였다. 하나님 앞에 직접 나오지 못하는 다수의 죄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한 사람을 택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중보자들을 통하여 다수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구약 시대에는 소수의 인간 중보자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었지만, 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멀리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기도했다.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눅 1:9,10)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성도들은 어디서나 하나님께 직고하는 특권을 누린다. 이는 죄를 제거하시는 완전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다. 구약의 성도들과는 달리 신약의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게 직접 기도하도록 허락되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우리 안에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었다. 이 신비를 요한 사도는 기름 부음(요일 2:27)이라고도 표현했다. 성령이 우리 속으로 오심으로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었고(고전 3:16), 하나님을 직접 모시는 신약의 영적 제사장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돌보심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약의 소수의 인간 중보자들에게 임했던 은혜보다 더 한 은혜가 성령 하나님을 모시는 영적인 제사장 된 신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의 기도보다 더욱 가까이에서 또렷하게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는 지금 왜 중보기도라는 말과 개념이 인정되어야 하는가? 기도에 있어서 특별한 은사, 직분, 조건을 선점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동일하다.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기도하는 각자의 믿음에 달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혜택을 입어 구원과 교제를 누리는 성도가 얼마나 바르게 신앙생활하고,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가? 이것으로 기도의 응답이 좌우될 뿐이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의를 가진 모든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더욱 가까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완전한 중보사역으로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사람, 진실하게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삶과 행실과 말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예수의 향기를 내는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께는 더욱 크게 들린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빨리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특별한 기도 전공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은 말이나 개념을 버려야 한다. 중보기도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 개념으로 기도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되었고, 계속 오해와 혼란과 부작용을 증폭시킨다. 불신자 전도를 위해, 교회의 어려운 일을 위해, 선교사들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 이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 고하면 된다. 그냥 기도하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모든 성도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또렷하게 들리도록 기도할 수 있다. 중보자의 입장으로 돌아서 특별기도 모드를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은혜를 부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의 당면한 어려운 일을 풀어주십시오!”라고 아뢰고 간구하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

감옥에 갇힌 베드로 사도를 위해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하였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하였다.

“감옥에 갇혀 생명이 경각에 달린 베드로 사도님을 위해서 중보기도합시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중보기도합니다!”

전혀 이러한 개념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완벽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성도에게 주신 기도의 특권으로 그냥 간구하였다. 감사드리면서, 지속적으로, 간절하게,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였다. 모든 성도가 타인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과 국가를 위해 그냥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b>무조건 배격해야 할 성경에 반하는 용어와 개념들</b>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분들은 대부분 사상과는 관련없고 단지 명칭을 쓸 뿐이라고 한다. 정말 용어만 쓸 뿐이지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기도에 관한 바른 이해와 자세, 그리고 그릇된 이해와 자세가 뒤죽박죽된 상태에서 중보기도라는 말을 쓰고, 그 개념을 말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은 것은 분명하다. 혹 아무 문제점이 없이 단지 용어만 쓴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것 까지도 고쳐야 한다.  

“기왕에 중보기도라는 말을 써왔고, 이미 자리가 잡혔는데, 그냥 그대로 가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악하다. 성경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스타일을 더 앞세우는 태도이다. 성경 말씀보다는 자신에게 친숙해진 ‘자신 믿음’을 중시하는 자세이다. 자신에게 좋으면 성경도 살포시 뭉개면서 가겠다는 자세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미혹과 혼란과 부작용을 초래하는 ‘이단스타일’은 바로 이렇게 탄생한다. 기름부음이라는 말로 인해 어떠한 혼동과 미혹을 경험하였는지, 성령운동이라는 말과 개념이 일어나면서 어떠한 오해와 부작용들이 교회를 더럽게 만들었었는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중보기도에 대해서도 역시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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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예언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말씀 2015-08-17 2375
43 성령운동과 기독교 신앙 2014-01-04 5396
42 성령운동가들의 이상한 인생 패턴 2014-01-02 10668
41 앤아버 반석교회가 CRC 교단을 떠나는 이유 2013-09-29 9209
40 비성경적인 이스라엘 사상, 이제는 분별할 때 2013-08-15 8389
39 "알파코스"-제3의 물결의 거짓부흥2 2013-08-13 17155
38 Promise Keepers(아버지학교)-제 3의 물결의 거짓 부흥운동 2013-07-24 13051
37 방언(3) -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계시를 보조했던 방언 2013-07-22 8048
36 방언(2) - “이방인도 성령받았음을 증거했던 방언” 2013-05-21 6109
35 손기철 장로,「알고싶어요 성령님」에 대한 서평 2013-04-27 49423
34 '신기'를 부르는 '성령의 기름부음' 타령 2013-03-16 6957
33 방언(1) - "십자가 복음이 완성된 구원계시임을 증거했던 방언" 2013-03-02 7126
32 예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중보기도운동 2013-01-12 6346
» 중보기도 사상은 비성경적 2012-12-10 7563
30 인터콥(최바울)의 변함없는 신사도운동, '백투예루살렘' 2012-11-02 6786
29 요즘 유행하는 이상한 기도 2012-09-08 8002
28 예언,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가? 2012-08-17 11246
27 방언(4) - 릴리리리 우알랄라! ... 성경의 방언일까? 2012-07-29 29902
26 인터콥(최바울)의 신사도 운동 2012-07-23 11041
25 찬양 속에 흐르는 사탄의 술수 2012-07-14 9028
24 에스더기도운동 측의 반론에 대한 보충설명 2012-06-19 6159
23 에스더기도운동의 신사도운동 2012-05-29 7359
22 배교의 징조 - 동성애자 안수 2012-05-22 6044
21 에스더기도운동의 중보기도 운동 2012-04-30 5852
20 하용조 목사와 온누리교회의 신사도운동 2012-03-04 17763
19 송만석 장로 등의 이스라엘 운동은 그릇된 사상 2012-02-07 7851
18 김하중 장로의 하나님은 부채도사인가? 2012-01-24 8832
17 이방 종교의 영성과 유사한 손기철 장로의 이적 2012-01-06 7371
16 방언,성령춤도 주는 귀신들 2012-01-03 9337
15 손기철 장로의 기름부음의 정체 2011-12-23 5578
14 신사도운동의 거짓부흥 2011-11-22 6073
13 손기철 장로의 신사도 운동 2011-11-22 6077
12 IHOP의 끝이 보인다! 2011-06-03 7941
11 IHOP의 24/365 중보예배 2010-12-15 10197
10 IHOP의 선지자와 예언 2010-12-02 5809
9 IHOP의 사도적 리더쉽 2010-12-02 8314
8 신사도 운동의 빗나가는 기도 2010-06-05 6642
7 신사도 운동의 사도와 선지자 2010-05-12 6558
6 신사도 운동의 쓰러뜨림 2010-02-21 6811
5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2010-02-10 8941
4 신사도 운동의 Back To Jerusalem 2010-01-30 8198
3 신사도 운동의 예언 2009-12-14 6384
2 신사도운동의 회개 2009-12-03 6240
1 신사도 운동의 금이빨 2009-11-24 10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