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믿음 신문
바른믿음 아카데미
앤아버 정착
미시간대학교 대학원
다국어 성경

신사도 운동의 사도와 선지자

조회 수 6550 추천 수 78 2010.05.12 06:50:36
<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font color="blue"; 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2:2)</font></p><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 height:150%">신사도운동을 뛰우는 두 날개가 있다. 사도와 선지자이다. 그들이 신사도운동의 좌청룡 우백호가 되어서 신사도운동 교회들을 급속히 부흥시키고 있다. 물론 그들이 일으키는 부흥이 진정한 성령의 부흥이라고 우리는 전혀 여기지 않는다. 신사도운동의 사도와 선지자들이 일으키는 현란한 부흥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즉시로 생각나는 딱 맞는 성경말씀이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저들에게 임하리니”(살후 2:9,10).

사도와 선지자들의 요란스러운 부흥의 실상은 바로 이것이다. 자칭 사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능력과 표적과 기적들이다. 애굽의 바로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하는 하나님의 기적의 일부를 그대로 재현해 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일으키신 열 가지 이적 중 처음 두  가지 재앙, 나일강의 물이 피로 변하는 이적과 강의 개구리들이 사람의 집으로 몰려드는 이적을 그대로 재현했었다. 바로의 술객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흉내를 내며 하나님이 받으실 경배를 가로채는 하나님의 원수 마귀의 종들이었다. 그들에게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수준의 영적인 힘과 능력이 있었던 것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각종의 기적을 행하며 영혼들을 사냥하는 신사도운동의 사도와 선지자들은 바로 그 옛날의 바로의 술객들의 뒤를 잇는 현대의 더욱 세련된 술객들이다. 그들에게서도 사탄의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금이빨 만들기, 각종의 질병 고치기, 빈번한 환상, 일상의 입신, 아무 때나 선포되는 거창한 예언들, 괴상망측한 기름부음, 이웃집 아저씨처럼 자주 나타나는 고위직 천사들 ... 이런 일들이 흔하게 동반되는 마귀의 술객들이 근사하게 사도와 선지자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흥분한다. 감정이 고무되며 열성이 더해진다. 사람들이 더욱 모인다. 그리고 급속히 부흥한다고 자랑한다. 과연 진리일까? 이것이 진정 성령의 사역일까? 의심해보지도 않고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다. 망설이고 미적거리다가 서서히 발을 담그다가 맛을 보고 깊이 빠지는 사람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의 생각과 판단이다. 결국 신사도운동을 살려주는 사람들은 목회자들이다. 목회자가 진리에 굳건하게 서 있으면 그 교회에 신사도운동이 들어오는 것을 불가능하다. 어떤 교회가 완전한 신사도운동 교회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그 목회자가 신사도운동 사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에 신사도운동 성향을 가진 집회와 프로그램이 다른 것들과 함께 운영된다는 것은 그 목회자에게 그런 프로그램과 집회를 위험하게 여기지 않는 영적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신사도운동의 위험성을 직시하고서 전혀 용납하지 않으면 다른 경로를 통해 신사도운동 성향에 조금이라도 미혹된 성도들이 바르게 교정되어진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스스로 다른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아서 떠나게 된다. 마음을 아프지만 그것이 교회가 진리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기왕에 시작한 목회이니 뭔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식당이건 수퍼이건 교회이건 일단 시작했으면 성공하여 자리를 잡아야 한다! ... 라면서 분별하지 않고 신사도운동과 손을 잡는 목회자들이 있다. 바로 그들이 신사도운동을 팽창시키는 마귀의 도구들이다. 어떤 목회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계통의 집회나 프로그램을 통하여 맛을 보고 변해버린 교인들이 생겨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형성된 좋은 관계를 깨고 싶지 않고, 또한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 더 열성적이어서 교회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는 점 때문에 더욱 올바른 가르침으로 경계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즐겁게 함께 힘을 합하여 나아갈 수도 없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 이렇듯 신사도운동의 확산은 교회들에게 많은 아픔과 괴로움을 주고 있고, 당분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끝은 빤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신사도운동과 비슷한 거짓 부흥운동이 있었다. 2000년 교회사에 이런 일은 언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마귀가 세우는 거짓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분명하게 경계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사도와 선지자의 재등장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과연 사도와 선지자라 자랑하는 신사도운동의 해괴한 엘리트들의 출현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일까? 지난 2,000년 동안 보이지 않던 그런 뛰어난 집단이 어디서, 어떻게 출현했을까? 조금이라도 당당하려면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신사도개혁운동을 이끄는 그 위대하신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의 출현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 늘 예민하게 살폈다. 그러나 아직 발견한 것이 전무하다.

1517년에 독일의 수도사였고, 사제였고,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서학 교수였던 루터로부터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남긴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의 개혁운동의 요지는 구원이 인간의 그 어떤 신앙적인 행위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면죄부를 비롯한 교회의 어떤 인위적인 전통이나 의식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은 오직 그 자신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의 문제라는 성경의 선언을 교회에 다시 회복시켰다.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그 개혁운동의 모토였다. 성경 원어에 정통했던 루터가 깊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시대의 교회의 실상을 보니 개혁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루터가 앞장을 섰지만, 그 주체는 성경이었다.  

그렇다면 신사도 개혁운동의 전위부대의 최정예 요원들인 사도와 선지자들의 출현에 관한 성경적 모토는 무엇일까? 그들이 주장하는 가장 근거가 되는 말씀은 에베소서 4:11,12절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신사도운동의 두 날개인 사도와 선지자의 출현에 대한 신사도운동의 이론은 무엇일까? 그들의 말은 다음과 같이 그럴싸하다.

“애초에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을 온전케 하려고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 이 다섯 가지 직분을 주셨다. 그런데 세속화된 사탄의 교회들과 교권을 틀어쥐고 횡포를 부리는 사악한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보존하기 위해 사도와 선지자들이 압살하여 사라지게 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종말의 대추수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신앙개혁운동을 시작하였고, 결국 2001년부터 사도와 선지자는 다시 출현했다.

지금 현재 세계의 교회는 하나님이 수립하신 새로운 영적질서를 거역하는 죽은 바리새인 교회들과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여 하나님의 대부흥 운동을 확산시키는 신사도 개혁교회들로 나뉘어 졌다. 죽은 중세의 로마교회와 새로 태동한 개신교회와 같은 이 두 세력은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중이다. 신사도 개혁 교회를 이끄는 하나님의 엘리트 일꾼들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일반 목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적 능력으로 굉장한 부흥과 추수를 일구고 내고 있다. 장차 온 세상에 이 부흥의 물결이 넘칠 것이고,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는 염려스런 이력이 많다!>

유명한 사람들에게는 출생과 성장에 관한 설화가 있다. 그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고 그런 유명한 설화들이 많다. 문신의 사도 타드 밴틀리, 선지자들의 밥 존스, 대예언자 폴 케인, 또 다른 사도 테드 헤거드 등의 신사도 개혁운동의 쟁쟁하신 분들의 이력에는 빈번한 감옥살이, 마약, 정신병력, 사탄과의 부르스, 동성연애, 어린시절부터의 빈번했던 천사들과의 조우, 무당계보의 가문, 결혼하면 질투나니 독신으로 살아 달라는 예수님의 부탁 등의 무지개 빛깔의 설화들이 자욱하게 깔려있다.  

한 두 목사가 범죄했다 하여 목사직을 폐지하자 할 수 없는 것처럼, 한 두 사람이 넘어졌다고 해서 사도와 선지자 직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다른 선지자 릭 조이너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선구자들이라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역사의 길을 여는 Pioneer들이다. 많은 목사들 중 그릇되는 사람이 나오는 것과는 비교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바울, 야고보, 베드로 같은 사람들이고, 한국 교회의 주기철, 이기풍, 순양원 같은 사람들이다. 신사도운동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먼저 그들의 위대한 pioneer들의 개인적인 죄와의 싸움에서 KO보다 비참하게 박살난 사건들을 의미있게 보아야 한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이 계신다. 아마 캔자스시티의 IHOP 기도원에 가서 “이 자리에 계신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은 손들어 보세요!”하면 수 십 개의 손이 올라올 것이다. 아마 그들의 이력도 조사해 보면 비슷한 설화들이 있을 것이다. 바른 신학공부와 건전한 신앙여정을 살아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결코 사도와 선지자일 수 없다는 신학적 증거가 드러나면 그들은 끝이다. 그 순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러면 그들은 다음의 성경 말씀에 정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요이 1:10).

<윌리험 브랜험이 이들의 원조였다!>

굳이 복잡하게 돌려서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가장 먼저 사도, 선지자를 운운한 선구자격인 인사에 대해서 알아보면 된다. 그가 과연 누구였는지를 보자.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주로 무슨 일을 벌였던 사람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그가 사도, 선지자 타령만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외에 그가 했던 일들을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신사도 운동의 특별 계급인 사도와 선지자의 기원을 어디서부터라고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많다. 그러나 가장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인물은 윌리엄 브랜험(William Branham)이라는 인사였다. 그는 1900년 초에 일어난 미국의 오순절 부흥운동의 한 지류에서 나타난 과격한 은사주의자였고, 1940-50년대를 풍미한 미국의 대표적인 성령운동의 이단이었다.  

교회를 심각하게 해치는 이단 중에서 참 다루기 까다로운 이단이 바로 성령파들이다. 성령! 성령! 하면서 지나치게 신비주의 일변도로 치닫다가 나중에는 심히 혼탁해 져서 사탄의 역사와 구별이 안 되는 노선으로 전락하는 부류가 이들이다. 윌리엄 브랜험은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온갖 신비적인 일들이 그에게서 일어났었다. 그는 천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나고 대화했다. 집회를 인도할 때에 자신과 함께 동행하는 천사에 대해서도 자주 소개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는 신비적인 능력도 발휘했다. 오늘 날 신사도 운동가들에게서 나타나는 기본 골격이 그에게서 이미 모두 나타났다.

윌리엄 브랜험의 가장 심각한 점은 자신이 종말에 보냄 받은 사도이며 선지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오늘 날의 신사도 운동의 사도, 선지자 타령이 태동했다. 그는 사도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직통의 예언계시를 전파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흥미를 느끼고 추종하면서 당시에는 큰 부흥과 세를 이루었었다. 그 외에도 삼위일체 교리가 사탄적이라고 주장했고, 77년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또 사탄이 하와를 성적으로 범하여 인류가 타락했고 했고, 시멘트벽까지도 자유로이 통과하며 활동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곧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건전한 교회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해괴한 행동과 사상으로 인해 결국 브랜험은 1949년에 자신이 소속한 하나님의 성회의 49회 씨애틀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추방되었다. 성령의 은사운동에 관하여 가장 열려있는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가 가장 먼저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추방하였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 정도로 그의 부흥운동은 부패했고, 위험스러웠고, 사탄적이었다는 것이다.  

<늦은 비의 신질서라는 운동이 근원이다!>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로부터 시작된 영적인 조류를 “늦은 비의 신질서”(The new order of later rain)이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그냥 늦은 비 운동이라고 부fms다. 그들의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언자인 폴 케인은 이미 20대 청년 시절에 당시의 이단 윌리엄 브래험을 만났고 교제하면서 사상과 영적인 토대를 형성하였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신사도운동권에서 가장 존경받는 전설의 대예언자로 인정받는 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오늘 날의 신사도운동이 1940년대의 늦은 비 운동의 재현이며 더욱 확대발전된 형태라고 진단하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윌리엄 브랜험의 늦은 비 운동의 미혹의 영(Spirit)이 폴 케인과 그리고 다른 중심인물인 밥 존스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착실하게 미국 교회 속에 잠입하여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땅 속에서 조용히 흐르던 그 물기가 다시 80년대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90년대 토론토에서 발원하여 세계 교회를 휘감는 거대한 빈야드 강이 되었다. 또한 그 강에 조금 늦게 합류하여 오래 동안 헤엄치며 놀았던 물고기 중에서 캔자스시티에서 선지자들의 교회를 이끌었던 마이크 비클이라는 대어가 있었다. 그가 후에 따로 떨어져 나와 캔자스시티에서 IHOP 기도원을 만들고서 더 물결을 더 크게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신사도 운동이다.

<사도와 선지자의 출현은 마귀로부터 시작되었고 성경이 도용되었다!>

불현듯 출현하신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이 벌이시는 신사도개혁 운동은 루터나 칼빈의 개혁처럼 성경과 연관된 개혁운동이 아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이 시대의 교회에 사도, 선지자의 직분을 회복하게 한 것이 아니다. 신사도 개혁 운동이라는 것은 근본 시작부터 정체불명의 마귀의 영(Satanic spirit)이 수상쩍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Contact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도, 선지자라는 단어가 있는 성경 구절이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그들에게 도용당하였을 뿐이다.

1517년에 시작된 개혁운동은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루터와 칼빈을 통하여 일하는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신사도 개혁운동은 웃기는 영들이 한심한 그들을 통하여 일하는 개혁운동이다. 그러니 교회를 병들게 하는 것 외에 더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의 소명도 다 그렇다. 그들에게 다가온 영이 “너는 종말 대를 위해 예비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도이다! 너는 영혼의 대 추수를 위해 쓰임 받을 선지자이다!”라고 하면, 그대로 믿는다.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하나님이 너를 보내신 것을 어떻게 믿겠느냐?” ... 이런 의심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역사하는 영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결코 성령이라고 볼 수가 없다. 삼위일체 교리를 사탄의 교리라 하고, 사탄이 하와를 성적으로 타락시켰다 하고, 휴거의 날짜를 정하였지만 맞지 않고, 마음대로 벽을 뚫고 통과하며 이동하는 종말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임박한 출현을 예고하고, 애완견 데리고 공원산책 나가듯이 집회마다 고위직 천사를 데리고 다녔던 신비주의 이단 윌리엄 브랜험이 이 엘리트 술객들의 원조이다. 그러니 지금 그들 속에 일하는 그 영(spirit)이 복음을 섬기는 건전한 영이라 할 수가 없다. 그 활동과 계시의 내용이 성경에 종속되지 않는 영들이 하나님의 영일 수는 없다.

그 영들의 음성이 의해 사도, 선지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스럽고 황당한 일인가? 그들은 겸손하지 않고 우쭐했기 때문에 쉽게 사탄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을 사탄이 먼저 알고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사도가 선지자가 되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지고 그렇게 믿어질만한 이적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된 후에 그들은 성경을 보았다. 성경을 보니 근거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한 절 한 절을 떼어서 보면 모든 이단들의 교리의 근가가 다 보이는 책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겸손한 자세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바르게 읽고, 바르게 해석해야만 하는 책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 그들의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구절이 성경에 있다. “여기 성경에도 분명히 나와 있는데, 왜 신령한 은혜를 입어 크게 쓰임 받는 나를 못 잡아서 안달이야? 네가 나처럼 은혜 받지 못했으며 가만히 있기나 하란 말이야! 죽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골치거리인 너희여! 아무리 기를 쓰고 막으려 해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종말의 대 추수와 개혁의 기차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자신있게 미치기 시작한다. 결국 남 보다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과 교만이 그들을 확실하게 사탄에게 속게하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과 다스림의 체계를 수립한 바울의 가르침에는 사도와 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잠시 언급한 그 부분을 통하여 지금 이 시대의 사도, 선지자 직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당치 않는 말이다. 배고픈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바울이 신약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 가장 자세하게 언급한 성경은 후배 목회자 디모데(딤전 3:1-13)와 디도(딛 1:5-9)에게 쓴 성경이다. 그곳에서 바울은 장래의 교회의 다스림의 체계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교회를 인도하는 중요 직분자들을 어떤 기준으로 훈련하여 세울 것인지에 대해서 자세한 지침을 주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13).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5-9).
신약교회의 직분에 관하여 가장 자세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이 두 성경에서는 어째서 사도, 선지자에 대한 언급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까? 왜 사도와 선지자자들이 어떻게 교회에서 사역하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을까? 신사도 운동가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그들은 오직 에베소서의 한 구절만을 가지고 우려먹는다. 그것 하나로 오늘 날에도 사도, 선지자가 있어야 성도와 교회가 온전하여 진다고 주장한다. 없으면 없는 만큼 교회와 성도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2,000년 신약 교회의 직분은 바울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교회의 장래를 위해 후계자로, 아들로 키우고 사랑했던 후배 목회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가르침에 근거하여 발전되었다. 바울이 말한 집사는 목회자를 돕는 평신도 직분이다. 사도행전 6장에서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상황에 따라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성례도 집행했던 목회자이기도 했으나 종교개혁 이후에는 지금의 평신도 직분으로 성격이 정착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장로”와 “감독”이라는 직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했다. 장로와 감독을 당시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그 시대의 목회자에 대한 호칭이었다. 다만 교회들이 속한 문화권에 따라서 선호하는 호칭이 달랐을 뿐이다. 구약 이스라엘의 문화를 계속 이어받은 교회들은 장로라는 호칭을 좋아했다. 그래서 유대인 선교에 전념했던 사도 베드로도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이스 문화와 더 친숙했던 이방인 교회들은 감독이라는 호칭을 선호했다. 감독은 당시 정부의 공무원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래서 바울의 글에서 장로와 감독이라는 호칭이 별다른 구분이 없이 호환되면서 나타난다.      

<2세기부터 교회의 직분이 상황화되는 과정에서도 사도와 선지자는 없었다!>

2세기에 들어서 감독이라는 직분이 조금 변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많아지면서 목회자도 많아졌고, 더불어 무질서한 일들과 이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관리하는 더 권위있는 특수 목회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바로 그 목회자에게만 감독이라는 호칭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교회의 환경이 변함으로서 직분도 그에 맞게 상황화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날 감리교회와 성공회 등의 교단에 여전히 존재하는 Bishop의 기원이다.

후에는 모든 지역의 감독들을 관리함으로 세계 교회의 일치를 도모해야 할 더욱 긴급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를 계승하는 로마의 감독이 세계를 대표하는 감독이라는 이론이 등장했고, 오늘 날의 교황직이 생겨났다. 그리고 후에 너무나 권위적이고 계층적인 직분제도로 인해 도리어 교회에 폐단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목회자들간의 계급을 다시 타파하여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것이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현재 교회의 목사와 평신도 장로직은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직분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직분제도의 변천사 속에 사도와 선지자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사도와 선지자직은 초대교회의 단회적 직분이었다!>

그러면 사도, 선지자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에베소서의 그 구절은 어디에다 적용해야 하는가? 신사도 운동가들은 초대교회 이후 교회를 장악한 사탄의 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도와 선지자직을 언급하는 그 말씀을 사장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교회는 온전하지 못하며,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사도와 선지자를 중심으로 한 오중직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다. 친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불과 100년도 못 지키고 또 사탄의 종들에게 유린당하게 하셨다는 그 하나님의 무능하심을 동정하라는 것이다.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가 사도와 선지자를 잃어버리신 하나님의 한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왜곡된 사악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개혁의 기치를 들도록 소명을 받았다고 그들은 우긴다. 정말 그럴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성경을 바르게 보려고 하지 않고, 단지 나타나는 현상에 성경을 맞추려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에베소서의 오중직을 언급한 구절은 신약교회의 과도기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한 당시의 교회는 여전히 생존한 사도들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교회에 나르는 살아있는 계시의 도구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교회들이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이 없었으니 그 당시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말아야 했을까? 그래도 믿음 생활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을까? 그 시기는 말씀금식의 시기였을까? 그럴 수는 없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포되어져야 한다.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주요 수단은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하고, 그의 말씀과 사역을 직접 보고 들었던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도 희소했고, 또한 하나씩 둘씩 소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누가 뭘 근거로 그 시대의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인가? 사람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기록된 성경이 없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을 성도들에게 먹이셔야 하셨다. "예언", "예언적 선포"라는 것이다. 말씀 선포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과 계획과 묵상이 중심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중심이 되어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이었다.  

주로 그렇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였다. 그러나 그런 말씀 선포사역에 엄청난 부작용이 따랐었다.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생각이 주가 되어, 때로는 악한 영이 개입되기도 하였다. 부패하고 연약한 인간이 그런 초자연적인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집접 받아서 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라면서 교회에서 외치고 다시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이 지었거나 마귀가 준 것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며 전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크게 따르게 된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많은 피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바울의 성경에는 예언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말고 잘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라고 강조되었다. 그때부터 이미 예언은 받기 어려운 것이었고 무턱대고 믿고 좋아할 것이 아니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믿으며 살자고 하면 이런 끔찍한 일을 보게되는 것이다. 기록된 성경은 이렇게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혜이다.

<사도와 선지자의 기능이 성경 속으로 흡수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이 모두 기록되었다. 세계 교회회의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온 진정한 신약성경의 목록이 확정되었다. 성경의 필사본들이 많아지고 여러 교회에 보급되었다. 교회와 말씀의 상황이 변한 것이다. 기록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해석하고, 성령충만한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적용하는 신앙생활의 패턴이 교회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성도와 교회를 온전히 교훈하고 가르치도록 성경이 교회에 주어졌는데, 왜 성경을 제쳐두고 직통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겠는가? 사도들은 이미 죽고 세상에 없었다. 성령이 주시는 감동을 따라 즉흥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들도 세례요한처럼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이 성경 때문이었다. 성경이 교회에 있는 한 그들은 굳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후에 선지자라 칭하며 예언적 선포를 행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지만, 대부분 끝이 불미스러웠고, 많은 교회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성경을 교회의 중심으로 두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도이고 선지자이고 싶은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사도와 선지자가 언급되어 있는데, 왜 지금은 없다 우기나요?”라면서 반발한다. 그러면 우리도 물어야 한다. “그 자신도 사도였고, 사도직과 선지자직에 대해서 가장 많이 설명하였던 바울은 왜 다음 시대의 지도자들인 후배 디모데와 디도에게 목회를 가르치는 편지에서는 집사와 장로(감독)를 선출하고 훈련하는 기준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가르쳤을까요? 어째서 교회가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자신의 뒤를 이를 후배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물어야 한다. 그들 중에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사도직이 성경과 교회를 위한 한시적인 직분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다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사후에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사도와 선지자직이 승계되지 않는 단회적 직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시대의 지도자들인 디도와 디모데에게 사도를 세우고 선지자를 양육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대마다 하나님이 보내실 홋날의 사도와 선지자에 대한 말씀도 없었던 것이다. 오직 교회의 직분과 다스림의 체계를 집사와 장로(감독) 중심으로만 설명하였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어떤 이는 “회는 항상 개혁되고 새로워져야 한다!”라면서 사도와 선지자의 재등장의 그 가능성을 열어 두려고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교회는 항상 변질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야 사도와 선지자의 필요성이 조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 사도와 선지가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어진다는 것이고, 이는 성경의 완성으로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정통신학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지금의 성경의 절대성이 무너지고, 더 나아가 성경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현재와 교회와 기독교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사도운도의 사도와 선지자를 내세우는 사탄의 목적이다. 지금 처음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2000년 동안 항상 마귀가 즐겨 써먹었던 수법이다. 자신이 사도이고 선지자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성경이 그토록 구별하여 내치라하는 “자칭 사도”(계2:2)일 뿐이다.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에는 성경을 허물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거짓 사도를 쫓아내야만 하는 심각한 상황이 수 없이 많았다. 어떤 곳에서는 그들이 묵인되고 자리를 잡았고, 분별하여 대적하는 참 믿음의 사람이 있는 어떤 곳에서는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며 쫓겨나기도 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분별하여 쫓아내는 성도와 교회를 칭찬하셨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우리도 자칭 사도를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려냄으로 성경을 지키고 교회를 지친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처럼,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기 위해 잠입한 거짓 사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물리쳐야만 한다.  

<진짜 사도들 외에 사도라 불리운 사람들이 있었으나 의미가 달랐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성경이 이미 알려진 사도 외의 다른 사람을 사도로 인정하였다면서 오중직의 현재성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4장에서 바나바도 사도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쓰여졌던 단어였다. 첫째는 신적계시를 교회에 나르는 하나님의 신적기관이 된 사도들, 즉 바울과 예수께서 지상에서 생전에 부르셨던 사도들이다. 둘째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세상에 보내어진 선교사라는 의미에서도 사도라는 말이 쓰여졌다. 12명의 사도들 속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 중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기에 매우 합당한 존경받는 일꾼에 대해서도 바로 이 차원에서 사도라고 불렀던 흔적이 성경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흔히 않았던 일이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훌륭한 지도자급의 존경받는 소수의 성도에게만 해당되었던 일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정 13장과 14장에서 바나바도 사도라고 불리우는 부분이다.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행 13:43).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가서 소리질러”(행14:14).

여기에서 바나바까지 사도로 거명되었다는 것을 가지고 신사도운동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들 외에도 다른 사도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바나바는 선교사 차원의 사도의 호칭이 부여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존 스토트이다. 그는 사도행전 14장을 연구하면서 “사도라는 말이 신약에서 두 가지의 의미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바울뿐 아니라 바나바에게도 사도의 칭호를 붙인 것으로 인하여 당혹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친히 임명받아 하나님의 신적 계시의 기관으로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교회로부터 복음전파의 사명의 위임받아 보냄을 받은 “교회의 사도들”을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교로서의 사도였고, 그 중에서 바울만이 특별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구별한다.  

그리고 신사도 운동가들은 로마서 16:7절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라”라는 부분을 통하여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도 사도였다고 한다. 그들이 사도들과도 깊은 교분이 있고 사도들에게서도 신망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그들이 많은 사도들 주에서도 더 탁월한 사도들이었다고 해석하면서 당시에 우리가 인정하는 원래의 사도들(The twelve apostles) 외에 이미 많은 사도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오역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헤프닝이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사도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는 의미이지, 사도들 중에서도 더 뛰어난 사도들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대다수의 번역본들이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일부 복음주의 입장에 선 성경학자들 중에서도 이 구절을 그릇되게 해석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일정기간 이 지상에서 머무셨던 동안(고전 15:4-8) 어떤 사람들을 사도로 임명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근거가 될 만한 사례들이 몇 가지 더 있으나 모두 그 이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세대 이후 세대의 그 누구도 사도의 호칭을 들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교회사가 확실히 증언하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경험하고서 사도가 된 사람들과 또한 바나바처럼 선교사 차원의 사도로 불리운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 시대의 지도자들을 교회는 속사도라고 불렀지,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 사도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그러므로 선교사 차원의 사도를 오늘 날에도 수 없이 있을 수 있다는 말도 말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떤 신사동운동 지지자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1:19)라는 구절을 가지고 원래 사도가 아니었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훗날 사도가 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바른 해석이 아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사도가 되었다고 볼 정당한 근거와 내용이 없다.  

<진짜 사도들에게는 성경적 정통성이 부여되었다!>

성경이 인정하는 사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성경적 정통성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서, 결코 신사도운동의 거짓 사도들에게 현혹당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 사도는 예수께서 직접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자로서 예수님께서 생전에 직접 부르시고 임명하셨던 직분이었다. 다음과 같은 성경적 증거가 있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3)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1;1)

둘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그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자들이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1l:21-22)

셋째, 사도는 예수께서 선포되는 계시를 확증하는 성령의 기적을 행할 능력이 주어졌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4-15)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이러한 성경적 정통성이 부여되었던 사도들 사후에 곧 바로 감독(장로)들이 교회를 이끌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에베소서 4:11-12절의 임시직들이 완성된 성경을 중심으로, 그리고 디모데전서 3:1-13절과 디도서 1:5-9절에 근거하여 출발된 장로와 집사의 새로운 질서와 다스림의 체계를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지금까지 상황화되면서 이어져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시 사도나 선지자가 등장해야 할 교회사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사도운동의 사도와 선지자들이 마귀가 보낸 짝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물리쳐야 한다.  

<신사도운동의 사도는 계시를 받는 사도이다!>

신사도 운동가들이 말하는 사도가 선교사 차원의 사도라면 문제는 약간 달라진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아 교회에 전달하는 신적기관으로서의 사도이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같은 사도라고 주장한다. 어니 그루엔 목사가 작정한 리포트를 보면 IHOP의 마이크 비클과 밥 존스가 꿈과 환상을 보고서 나눈 많은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는 사도바울을 능가하는 수 십 명의 사도가 자신들의 운동을 통하여 등장할 것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성경과 상관없이 직통으로 계시를 받아서 나르는 살아있는 인간 사도와 선지자를 당연시한다. 그래서 성경이 위협당하고 있다.  

그 증거들은 너무나도 많다. 서울에 자신을 스스로 사도라 칭하는 자가 있다. 미국의 뉴욕의 사랑과 진리교회라는 곳에 와서 3일간 부흥회를 인도할 때 전하였던 설교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사도라고 떵떵거리면서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에서는 자신이 고안한 사도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직접 인도한다고도 하였고, 실제로 그 교회의 부흥회 마지막 날 집회를 사도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로 진행하였다.

그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바울 곁에서 성경을 저술하도록 도왔던 한 고위직 천사가 자신에 붙었다고 하였다. 로마서를 기록하는데 영감을 준 그 고위직 천사가 자신이 책의 다양한 집필하도록 영감을 준다고 말하는 엄청난 이야기를 들을 때에 내 가슴은 새처럼 떨며 진동했었다. 대체 사도 바울의 성경저술을 도왔던 그 최고위직 천사가 이제 그에게 붙어서 뭘 한다는 것일까? 바로 직통의 계시이다. 그래서 그는 사도인 것이다.  

2010년에 뉴욕과 미주의 한인 교회들을 뜨겁게 했던 한 교회가 뉴욕에 있다. 그곳에서도 사도가 문제가 되었다. 목사님께서 자신에게 사도의 소명이 임했다고 수요일 밤 예배 중에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 문제였다. 그 분은 캔자스시티의 IHOP을 자주 다니면서 기도했고, 그곳의 선지자들에게 특별한 예언을 받았던 분이다. 그곳의 선지자들에게서 받은 예언 중에 사도적인 부르심이 임하여 일반 목회자가 아니라 사도로서 movement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예언을 설교에서 언급함으로 큰 논란이 되었다.

나도 직접 영상으로 들어보았는데, 아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도직 소명에 관한 선지자의 예언을 받으신 것이 명백했다. 후에 큰 문제가 되자 IHOP의 대표는 직접 나서서 자신과 IHOP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나타나는 사도사역과 소명은 명사로 표현되지 않고 형용사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사도소명"이 아니고 "사도적소명"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래서 더 큰 논란이 일어났었다.

현재의 우리의 신앙이 사도들로부터 전달받았으니 당연히 우리의 믿음이 사도적이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신앙을 계승한 우리들의 교회들도 당연히 사도적이다.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규범인 성경이 사도적 계시 그 자체이고, 성경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사도적인 성도들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사도적 신앙 위에 서 있는데, 왜 몇 개인에게 특별한 사도적 소명에 주어진다면서 선지자라는 자들의 입이 예언을 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소명을 감당하도록 또 무슨 높은 천사가 붙어서 다니기를 시작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여간 그들에게는 왜 그렇게 자주 높은 천사가 붙어 다니는 일이 많고, 왜 그리도 자주 천사가 옆에서 돕는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 당시 그 분에게 그런 예언을 한 입들이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입이라면 그곳에 갔던 모든 사람들이 그 입들로부터 예외 없이 그런 말을 들었어야 한다. 신약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미 사도적인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정한 사람에게만 사도적 소명을 운운하였으니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사도의 출현을 망령되이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종결된 계시인 성경을 넘어선 또 다른 직통의 거짓 계시를 받는 거짓 사도를 세우려를 마귀의 수작인 것이다.

이것이 신사도운동의 사도직의 실상이다. 절대로 세상에 보냄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야 할 증인이라는 의미에서 쓰여지는 사도라는 용어가 아니다. 특별하고 새로운 계시의 기관으로서의 사도이다. 그러니까 그런 예언을 받은 그 본인이 들떠서 “나에게만 영광이 아니라 우리 교회 차원에서의 영광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신사도 운동의 오중직 이론의 실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직하지도 않다. 비난이 많이 쇄도하면 몸을 낮추고 엎드린다. “우리가 말하는 사도란 그리스도의 특별계시의 도구로서의 사도라는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진 사도로서 ...”라며 자주 몸을 낮춘다. 그리고 잠잠해지면 또 다시 일어서서 계시니 예언이니 환상이니 ... 그런 거짓 사도와 선지자에 대한 이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교만하고 부패한 마음이 사도와 선지자 병의 근원이다!>
              
나는 교만한 공명심 때문에 사도, 선지자 타령이 더 크게 기승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신사도운동에 앞장서거나 열심히 가담하는 사람들 중에서 명예와 이름을 탐하지 않는 사람을 못 보았다. 그쪽에 선 모든 사람이 사도이거나 선지자이다. “나는 사도도 선지자도 아니고 기도하는 무명의 성도일 뿐이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다. 모두가 사도, 선지자 되기 위해 안달이 났다. 사도, 선지자 되었다고 과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뿐이다.

서울의 그 황금면류관을 쓰고 대관식까지 했던 웃기는 사도님의 카랑카랑한 설교를 들으며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피터 와그너는 그의 책에서 한 사람이 오중직 중에서 하나의 직분만 받는다고 했는데, 틀렸어요! 저에게는 오중직이 모두 임했습니다. 수많은 정상급 예언자들이 모두 그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 또한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에 옆에서 계시를 전하였던 한 고위직 천사가 저와 함께 하고 있다고 여러 선지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 저에게는 세상 교회의 그릇된 교리를 바로 잡는 사명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싱싱하고 따끈따끈한 직통계시를 받아 교회에 선포하는 계시의 도구로서 사도라고 믿지 않는다면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 신사도들은 자신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사도, 선지자 타령하는 사람들 중에서 겸손한 사람이 없다. 대부분 자랑 못해서 안달이고, 교만하지 못해서 난리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높여주기 위해 애를 쓴다. “내가 000에 대해서 받은 계시는 이러합니다”라면서 서로 높여주고 자랑해주는 거짓 예언을 남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겸손한 사람이 그들 중에는 거의 없다. 사냥하는 사탄의 영들이 “너는 이제부터 사도다! 이제부터 선지자다!”하니 그대로 믿고 좋아서 뛴다. 영적으로 존귀하게 높아진다는데 싫어하기도 쉽지 않는 일이다. 이것이 신사도 개혁운동의 자랑스런 Pioneer들이신 사도님들과 선지자님들의 실상이다.

그들에게 다가온 영들이 더 믿고 깊이 빠지도록 기적을 보여주고 환상을 던져주니 더 잘 믿는다. 그들의 예리한 영성과 그들 교회의 급속한 부흥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다. 결코 성경을 연구하고서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에서 사라진 것을 되 찾아낸 성경중심의 개혁운동이 아니다. 사도와 선지자 타령은 이미 마귀에게 완벽하게 사기 당하여 쓰임 받는 불쌍한 인생들의 노래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76 누가 이 엄청난 사실을 외쳐 벼랑으로 가는 영혼들을 구할까? 2017-11-11 141
75 방언이란 무엇인고 예배, 기도회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것인가요? 2017-06-21 299
74 여전히 비성경적인 중보기도를 주장하는 강순영 JAMA 중보기도 대표 2017-06-02 227
73 교단과 신학교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지를 분별하는 기초항목 2017-04-11 476
72 한결같기 2017-03-18 430
71 낭떠러지 2017-02-04 661
70 뛰어들기 2016-12-03 638
69 진리소통 2016-11-13 699
68 칭의를 주신 분은 반드시 성화를 이루신다 2016-10-03 1025
67 그런 뜨거운 체험은 접신인가? 성령세례인가? 2016-09-27 1178
66 사랑의 교회 중보기도 학교는 성경적인가요? 2016-09-27 1067
65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의 열쇠 2016-02-24 1879
64 '4차원의 영성'은 다른 종교의 사상 2016-02-18 1955
63 환상과 스쳐가는 그림이 성령의 역사인가요? 2016-02-09 1921
62 병든 교회는 옹알거림과 CCM으로 간다 2016-01-28 2294
61 조용기 목사의 성령운동은 비성경적인 사술 2016-01-25 1812
60 (고)한경직 목사는 성자였나? 배교자였나? 2016-01-25 2233
59 김성로 목사는 예수님의 땅과 하늘의 이중제사 주장 2016-01-12 2032
58 초대교회의 예언의 은사 2016-01-12 1916
57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차등하며 부활을 앞세워 2016-01-09 2252
56 (영상)현대 변태방언과 현대 교회의 신앙이탈 2015-12-04 2354
55 부활복음은 십자가 모르는 김성로 목사의 목회브랜드 2015-11-27 3234
54 '전설의 고향'같은 피터 와그너의 '통치신학' 2015-11-22 2031
53 춘천 한마음침례교회의 부활복음(간증운동) 성경적인가요? 2015-11-22 3549
52 성경은 예언의 내용을 분별하라 한적이 없다 2015-09-08 2576
51 명성교회 특새소리는 한국 교회 초상치는 소리 2015-08-31 3177
50 로만 칼라는 다원주의(천주교) 배도의 상징 2015-08-28 2969
49 이 시대의 방언은 뭔가요? 2015-08-21 2795
48 주기철,손양원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춤추는 날 2015-08-18 3102
47 인터넷처럼 하나님께 접속하는 예언 2015-08-17 2530
46 남침례교단 방언관련 선교 정책 변경은 그릇된 일 2015-08-17 2808
45 성령을 조종하는 안수기도는 불가능 2015-08-17 2704
44 예언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말씀 2015-08-17 2371
43 성령운동과 기독교 신앙 2014-01-04 5382
42 성령운동가들의 이상한 인생 패턴 2014-01-02 10227
41 앤아버 반석교회가 CRC 교단을 떠나는 이유 2013-09-29 9179
40 비성경적인 이스라엘 사상, 이제는 분별할 때 2013-08-15 8343
39 "알파코스"-제3의 물결의 거짓부흥2 2013-08-13 16653
38 Promise Keepers(아버지학교)-제 3의 물결의 거짓 부흥운동 2013-07-24 13016
37 방언(3) -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계시를 보조했던 방언 2013-07-22 8034
36 방언(2) - “이방인도 성령받았음을 증거했던 방언” 2013-05-21 6103
35 손기철 장로,「알고싶어요 성령님」에 대한 서평 2013-04-27 49400
34 '신기'를 부르는 '성령의 기름부음' 타령 2013-03-16 6943
33 방언(1) - "십자가 복음이 완성된 구원계시임을 증거했던 방언" 2013-03-02 7111
32 예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중보기도운동 2013-01-12 6327
31 중보기도 사상은 비성경적 2012-12-10 7549
30 인터콥(최바울)의 변함없는 신사도운동, '백투예루살렘' 2012-11-02 6763
29 요즘 유행하는 이상한 기도 2012-09-08 7993
28 예언,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가? 2012-08-17 11128
27 방언(4) - 릴리리리 우알랄라! ... 성경의 방언일까? 2012-07-29 29775
26 인터콥(최바울)의 신사도 운동 2012-07-23 10973
25 찬양 속에 흐르는 사탄의 술수 2012-07-14 9012
24 에스더기도운동 측의 반론에 대한 보충설명 2012-06-19 6154
23 에스더기도운동의 신사도운동 2012-05-29 7348
22 배교의 징조 - 동성애자 안수 2012-05-22 6025
21 에스더기도운동의 중보기도 운동 2012-04-30 5844
20 하용조 목사와 온누리교회의 신사도운동 2012-03-04 17736
19 송만석 장로 등의 이스라엘 운동은 그릇된 사상 2012-02-07 7840
18 김하중 장로의 하나님은 부채도사인가? 2012-01-24 8798
17 이방 종교의 영성과 유사한 손기철 장로의 이적 2012-01-06 7363
16 방언,성령춤도 주는 귀신들 2012-01-03 9291
15 손기철 장로의 기름부음의 정체 2011-12-23 5576
14 신사도운동의 거짓부흥 2011-11-22 6059
13 손기철 장로의 신사도 운동 2011-11-22 6070
12 IHOP의 끝이 보인다! 2011-06-03 7936
11 IHOP의 24/365 중보예배 2010-12-15 10163
10 IHOP의 선지자와 예언 2010-12-02 5800
9 IHOP의 사도적 리더쉽 2010-12-02 7902
8 신사도 운동의 빗나가는 기도 2010-06-05 6629
» 신사도 운동의 사도와 선지자 2010-05-12 6550
6 신사도 운동의 쓰러뜨림 2010-02-21 6800
5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2010-02-10 8931
4 신사도 운동의 Back To Jerusalem 2010-01-30 8186
3 신사도 운동의 예언 2009-12-14 6375
2 신사도운동의 회개 2009-12-03 6226
1 신사도 운동의 금이빨 2009-11-24 1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