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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운동의 거짓부흥

조회 수 6371 추천 수 47 2011.11.22 00:06:11
<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1.50pt;line-height:130%"><font color="blue"; 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1.50pt;line-height:130%">“만일 누가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 구나”(고후 11:4))</font></p><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 height:150%">“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 4:1)

신사도 운동의 최고의 무기는 급속한 부흥이다. 그 속도가 실로 엄청나다. 어떤 지역에 신사도운동이 확산되는 경로는 대부분 신사도운동 교회나 단체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그곳의 어떤 교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지역의 한 교회 속으로 신사도운동 성향이 내포된 프로그램이 유입되면 금세 그 지역에서 반응이 일어난다. 좁은 방에 난로가 들어가 공기를 데우는 것처럼, 그 교회에서부터 온기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옆의 다른 교회들의 성도들에게까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전파된다. 동시에 그 교회가 요즘 부흥한다는 소문이 함께 퍼지기 시작한다.

<신사도운동 성향의 집회와 프로그램을 통해 급히 확산된다!>

타주에서 목회하는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화났다가 잠시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였다. 들어보니  서울의 한 이상한 교회에서 나온 사람이 무슨 중보기도학교라는 것이 그 지역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 사람과 그 프로그램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지역의 한 작은 교회에서 그것을 열었는데, 다른 목회자들이 그 목사를 이구동성으로 말려도 듣지 않는다고 하였다. 결국 그 중보기도학교라는 것은 시작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당장 그 교회에 사람들이 더 많이 드나들기 시작하고 주일에는 이전보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했다.

신사도운동은 이렇게 소리없이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일단 그 씨앗이 어떤 곳에 들어가서 싹을 내기 시작하면 크게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면서 열성을 내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겨난다. 이전과는 다른 성향의 감성과 행태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뜨겁게 뭉치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반드시 그들의 그런 모습을 거부하면서 매우 염려하는 사람도 꼭 생겨난다. 이것도 신사도운동이 확산될 때에 그 현장에서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신사도운동 성향이 농후한 프로그램이나 집회가 자리를 잡거나 지나가면 반드시 변화가 빠르게 일어난다. 그 현장에서 경험한 본인들은 급속한 성장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확신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그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힘을 쓰기 시작한다. 온실의 채소처럼 사람들의 영적인 성향과 패턴이 빠르게 변하고 비대해지는 것은 거기에 어떤 영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하고, 그들로 하여금 부인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주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매우 위험스러운 질환을 가지신 분이 담당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캔자스시티로 날아왔다고 미국에서 글을 남긴 경우를 보았다. 캔자스시티는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마이크 비클이라는 이상한 원장님이 운영하시는 IHOP이라는 기도원이 있는 곳이다. 도대체 거기가 어떤 곳이기에 그 먼 거리를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을까? 건강에도 유의해야 할 사람이 의사의 권고도 뿌리치고 그 먼 거리를 날아가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신사도운동의 영성 때문이다. 이렇게 신사도운동의 힘은 강하고 매력적이다.  

아무리 옳은 것일지라도 세력이 미약하면 관심을 끌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받는다. 반대로 잘못된 것일지라도 강하게 일어나면서 세력을 형성하면 사람들은 관심을 주고 존중해 주려는 한다. 인간은 이렇게 우매하고 어리석다. 인간은 사물의 겉모습을 보고서 많은 정보를 얻고 속성을 판단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주공간에서는 사물에게 질량은 사라지고 부피로서 작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서도 사물의 크기와 부피는 언제나 중요하다.

우리의 이런 속성 때문에 신사도운동은 우리의 주변으로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신사도운동은 마치 에덴동산의 선악과 같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운동이다. 먹지는 말아야 하는데 고개를 돌리기가 쉽지 않다. 어떤 과일보다 탐스럽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하여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던 선악과처럼 신사도운동도 그렇다. 급속히 팽창하는 모양새가 과일 중에서 제일 못났다는 모과와 같고 물고기들의 망신이라는 꼴뚜기 같다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설들과 하는 짓들을 보면 쉽게 분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에는 귀신이 귀신같지 않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너무나도 그럴싸한 유사한 믿음의 옷을 입고 나타났었다. 선교학과 교회 성장학의 대가라며 수십 년 동안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피터 와그너라는 사람이 그들의 대표이다. 한때 한국에서는 그의 책을 읽지 않은 목사가 없었고, 그가 저술한 책들은 모두 최고의 인기를 누렸었다. 그가 교수로 있었던 캘리포니아의 Fuller Seminary는 너무나도 유명했었다.

바로 그 사람이 기독교의 2,000년 역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최고의 배교의 업적을 남기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가 2,000년에 신사도운동의 역사에 분수령이 되었던 국제사도연맹을 조직했고, 2008년에는 세계적인 주목을 끌면서 플로리다에서 타드 밴틀리라는 사람을 사도로 안수하였다. 사람이 안수하여 사도를 세우는 희대의 명장면을 보면서도 피터 와그너가 주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멍하니 보기만 했었다. 그를 무조건 맹신했던 한국교회도 신사도운동의 직격탄을 맞아 엄청난 홍역을 치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 4:1).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 없이 이러한 일들을 경고하셨지만, 많은 목회자들과 특히 많은 선교사들이 신사도운동은 이러한 경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그럴싸하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특징들을 앞세우면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교회에 대해 자부심이 특심하다!>

부흥하는 신사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인 자기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강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주목되는 현상은 자신의 교회에 대한 특출한 자부심과 열정이다.  정말로 보통 교회의 성도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모든 목회자들은 자기 성도들이 교회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하면 행복하다. 나도 그렇고 모든 목회자들이 다 그렇다. 애써서 목회하고 있는데 성도들이 교회를 비방하거나 불평하면 참 마음이 괴롭다. 다수가 교회를 사랑하고 칭찬할지라도 교회를 싫어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비록 단 한 사람뿐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목회자는 마음이 괴롭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사도운동 교회의 교인들은 그들의 교회에 대해서 투철한 열정과 자부심으로 뭉쳐있다. 그러니 어떤 목회자가 그런 교회를 만들어 보고 싶지 않겠는가? 신사도운동이 나쁠지라도 나쁜 점만 빼고 적절히 도입하면 될 것이라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신사도운동의 가장 교묘한 증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들의 자기 교회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자부심은 그 근본부터가 바르지 않다. 자기 교회만이 영적으로 살아있고 세상의 다른 교회들은 모두 영적으로 죽었거나 다 죽어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비정상적인 자부심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사도운동에 빠진 사람들과 교회들의 특징이다. “바리새인들”, “낡은 가죽 부대”, “기름부음 받지 못한 종교지도자”, “종교의 영” ... 신사도운동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말로서 성경적인 신앙을 수호하고 신사도운동을 배격하는 우리를 비판하며 조롱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들을 반대하는 우리는 마귀의 조종 받으면서 진리를 대적하고 있는 일종의 죽은 영적인 시체들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교만과 막나감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탄이 그들에게 주입한 기만적인 특권의식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자기들만이 마지막 시대의 특별한 성령을 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 “환상과 예언의 영”, “종말의 대 부흥”(end time revival), “거룩한 웃음”, “고위직 천사들” ... 이런 웃기지도 않는 거짓된 말장난으로 자신들의 큰 영적중병을 가리고 있다. 마귀가 보여주는 허상에 속아서 아까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지도자에게 무척 충성한다!>

신사도운동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자기 지도자에게 더욱 비범한 순종과 충성심을 보인다. 보통의 교회의 성도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한 자세로 무척이나 자기 목회자를 보호하고 사랑한다. 만일 자기 교회의 목사가 다른 지도자가 언론에서 비판을 받으면 절대 방관하지 않는다.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대변하고 싸우는 사이버 전사들이 된다. 보통의 교회에서는 자기 목사를 위해 그렇게 애쓰는 그런 특공대원을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신사도운동 교회에서는 다수가 "One shot! One kill!"의 능력을 가진 특공대원들이고, 상당수가 언제든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예비군들이다. 그래서 자신들과 관련된 기사의 댓글을 보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진리를 따르는 군대의 앞장선 군사를 향하여 조준사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신사도교회의 요원들을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성도들의 목회자를 향한 뜨거운 신뢰와 협력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성도가 목회자를 위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충성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설 수가 없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바울에게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줄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갈 4:15). 빌립보 교인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조금도 변치 않은 사랑과 헌신을 보냈었다(빌 4:14,15).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바울의 제자 디모데, 디도, 누가는 조금도 변치 않고 바울을 끝까지 따르고 섬겼다. 데마같이 버리고 떠난 후배도 있었지만(딤후 4:10)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고난을 견딜 수 있었다.

바울이 모든 고난에 굴하지 않고 지중해를 세 번이나 돌면서 복음을 온전히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끝까지 돕고 섬겨주는 제자들과 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날의 교회와 목회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 안에서 사랑과 의리로 뭉친 목회자와 성도의 신의와 사랑이 교회를 세우는 힘이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는 세워질지라도 지속될 수가 없다.

그러나 신사도운동 교회와 단체들의 핵심 멤버들의 지도자에 대한 자세를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지도자에게 성경적인 비판이 가해지면 하나님이 부여하신 고귀한 인격과 성품까지 내 팽개치기를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살벌하고 집요한 전사로 돌변해 버린다. 성경적 비판을 가하는 사람에 대하여 추잡한 인신공격은 아무것도 아니다. 독하고 사나운 댓글, 은근한 협박, 본질과 아무 관계없는 약점(?)을 찾아 반전을 꾀하려는 간교함 ... 이러한 점들이 특히 신사도집단의 핵심 멤버들의 주특기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지도자를 위해 애쓰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충성이 아니다. 바로 그런 면들을 볼 때에 비슷하지만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다른 영과 다른 예수”(고후 11:34)가 그들 속에 이미 자리 잡아 버렸다는 확신이 든다. 그래서 더욱 머뭇거리지 않고 대적할 수 있는 확신이 생긴다.  

그들의 이러한 특징도 비성경적인 특권의식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지도자만이 바른 길로 인도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거짓된 확신이 임한 것이다. 그들의 지도자에게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과 성령의 특별한 기름부음이 임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지도자를 만난 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은혜이고, 그래서 자신들이 영적으로 크게 증진되는 특별한 은총을 누리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기름부으신 목사님이심을 알았습니다!”라는 식의 공개적인 간증이 많다.

<기도와 찬양이 더욱 뜨겁다!>

신사도운동 교회의 부흥의 또 하나의 특징은 특별할 감성(?)이 넘치는 기도와 찬양이다. 신사도운동 교회들의 기도와 찬양은 매우 뜨겁고 그 속에는 뭔가 표현가지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마치 괴로운 사람이 급히 나발을 불어 마신 소주가 일으키는 감정의 흥분과 같다고 생각된다. 신사도운동의 집회들과 프로그램에는 특히 감성을 자극하여 몰입하게 하는 뭔가 넘친다. 그래서 자연히 기도와 찬양의 분위기가 좋다고 말하게 된다. 사람들은 정확하게 그 이유를 모르면서 “이 교회는 뭔가 영적인 것이 넘친다!”라고 말한다.  

이런 부분은 말하기 참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그렇다고 반드시 마른 감정과 차가운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무미건조하고 차갑고 냉정해야 건강한 교회이고 바른 예배라는 것이냐? 라고 나에게 공격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다만 기분이 고양되고, 황홀한 감정과 분위기(feeling of ecstasy)를 느끼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이 교회의 부흥을 논할 성경적인 포인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예배의 목적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올바른 헌신과 경배와 봉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우리는 정해진 예배시간  뿐 아니라 항상 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셔서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모델로 함으로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이고, 예배의 중심은 언제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반응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과 순종으로 연결되는 것이 예배의 결과이고 열매이다. 이 모든 과정을 간단히 말해 Christianity라고 하지 않는가?  

<예배의 중심은 말씀이고 예배의 결과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황홀을 느끼면서 무아지경의 기도를 체험하고 다른 한편으로 열광적인 눈물의 찬양(노래)을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런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 때문에 어떤 교회가 좋다고 소문나고 사람들이 그리도 몰려들고 있다면, 그 교회는 이미 신사도운동에 점령되어 버린 교회이다. 그런 교회에서는 어김없이 신비스런 이적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미치고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말씀을 추구하지 않고 신비와 황홀과 영적쾌락을 따르고 섬긴 비극적인 결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믿음을 타락시킨 가나안의 바알 종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 집회와 전반적인 성향은 바로 그 바알 종교와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대한 맑고 선명한 마음에서의 이성적인 반응,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건실한 삶이 이어지는 것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나타나는 거짓 계시와 이상한 성령의 임재(?), 그에 따라오는 신비스러운 일들에 열광하면서 자신들의 싸이즈가 비대해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자랑한다.  

문론 건강한 신앙의 한 요소로서의 감성은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찬양과 기도의 분위가 그 범위 안에서 열정적이어야 한다. 반드시 교회의 분위기가 차갑고 교리적이어야 좋다는 것은 괴변을 늘어놓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감정을 고양시키는 측면에다 예배의 성패를 건다거나,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조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태지나 외국의 유명한 인기 가수들의 공연에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며 눈물을 흘린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국민가수 조용필의 집회에서도 신사도운동 집회에서 별짓을 다하는 교인들처럼 “오빠~!”를 외치면서 열광하고 실신하기까지 하였던 사람들이 예전부터 있었다. 감정을 흔드는 각종의 악기와 최고의 장비들을 사용하는 신사도운동하는 교회들의 집회에서는 더욱 그런 일이 쉽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노래와 분위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터치하며 감정의 샘이 터지게 만드는 찬양사역자들의 집회를 본 적이 있다. 특히 리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젊은이들이 열광하면서 거의 미쳐가는 모습도 보았다. 그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어디까지가 찬양에 합당한 감정이고, 어디부터가 그 분위기 자체에 쓸려서 들뜨고 흥분된 것인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분명한 것은 그런 열광적인 찬양을 하나님이 다 받으시고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는 이러한 분위가 더욱 심하다. 그들만의 특이한 감성모두가 있다. 그들의 집회의 찬양과 기도의 특별한 감성모두에 대해서 딱히 이렇다!  ... 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분명히 그 계통의 특이한 감성이 발견된다. 만일 누가 나에게 사전정보를 주지 않고 신사도운동의 집회의 찬양영상과 일반 교회의 예배에서 성도들이 찬양하는 영상을 보여준다면 어떤 사진이 신사도운동 집회의 모습인지 가려낼 수 있을 것 같다.

<신사도운도에 빠진 사람들은 더욱 잘 모인다!>

그 외에도 신사도운동 교회의 사람들은 더 모이기를 잘한다. 예배를 드리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은 그들의 교회에서는 매우 드물다. 일반 교회들의 경우처럼, 등록만하고 결석을 예사롭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배와 봉사에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도 일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흔하지 않다.  대부분이 교회생활에 부지런하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이 되고 은혜(?)가 된다고 보고 온 사람들이 누가 한 적이 있다. 그런 분들은 나도 신사도운동을 도입하여 교회가 부흥되고, 목회가 더 즐거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던 인간적으로는 좋은 분들이다.

신사도운동에 합류한 교회의 성도들은 예배와 기도회를 비롯하여 자기 교회의 각종의 일들에 뜨겁게 헌신한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이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실현되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자랑한다. 그러나 이도 부러워할 일이 아니고 특별하게 볼 일도 아니다. 한번 이 점을 생각해 보라! 뭔가에 홀려 미친 듯이 빠져드는 사람들이 그 미치게 만드는 일에 게으르게 반응하고 지루해하면서 따라간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청소년 시절 처음 당구를 배운 사람들은 모두 잠시 미쳤던 사람들이다. 모든 종류의 사각형의 물체를 보면 당구대로 보이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심지어 잠을 자려고 누우면 천정의 모든 사각 모양들이 다 당구대로 보였다. 청소년 시절에 처음 당구를 배운 사람들이라면 다 그랬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신사도운동 집회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꼭 그와 같다. 신사도운동에는 어느 운동이나 어느 사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마약성 영성이 있다. 사람들이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이 깊이 그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 곧 그들의 부흥이다. 그러므로 자기 교회의 예배와 기도회와 모임들은 깜도 안 되는 기본이고, 멀리 타주에서 벌어지는 신사도 운동가들의 특별집회와 심지어 해외단기 단기선교까지 신사도영성에 취해가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간단한 기초 교양훈련에 불과하다.

차라리 믿음이 게으른 사람이라면 애초에 신사도운동 집회나 프로그램을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니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무슨 일에든지 결코 부지런을 떨지 못하는 천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사도운동의 맛을 조금 보았을지라도 더 발전되지도 않고 곧 흥미를 잃을 것이지 차라리 복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신사도운동의 실제를 경험하고 나면 자기를 태워 죽일 불을 향하여 더 가까이 나아가는 불나방 같이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이는 사도와 선지자 병에 걸려 들떠 있고, 어떤 이는 그 정도는 아니라도 주변의 친구들과는 확연히 다른 영적 엘리트 코스로 들어섰다는 환각에 빠져서 물불을 못 가린다. 그러니 그들이 게으르다면 말이 되겠는가?  

그러나 진실을 알고 나면 절대로 부러워 할 일이 아니다. 다른 영(고후 11:4)에 취하여서 모두가 함께 미쳐 돌아가는 집단 환각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의 열심과 열정을 보고서 신령하고 은혜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도 한심한 사람이거나 앞으로 신사도운동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다.  

<신사도운동의 부흥은 짝퉁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해 신사도운동의 부흥은 분명히 가짜이다. 요즘 명품과 너무나도 비슷하여 명품의 AS를 담당하는 전문가가 아니면 진위를 알 수 없는 대단한 짝퉁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품격있는 짝퉁은 수명을 다할 때까지 귀하게 명품대접을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명품과 짝퉁은 엄연히 생산과정이 다르고 품질이 다르고 족보(생산번호)가 다르다. 아무리 근사해도 짝퉁은 매우 좋은 제품을 모조한 유사품일 뿐이다.

신사도운동의 부흥은 참된 성령의 부흥을 모조한 짝퉁에 불과하다. 무엇을 기준으로 그렇게 판정해야 할 것인가? 원조 부흥사들과 그들이 일으킨 원색적인 성령의 부흥이 기록된 사도행전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부흥과 신사도운동의 부흥의 증상들을 다시 보면 마귀의 거짓 부흥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사도행전 시대를 성령이 처음 소나기같이 쏟아진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그 시절을 이른 비의 시대라고 하고, 지금 자신들이 성령의 역사(?)를 전 지구적으로 벌이고 있는 지금은 늦은 비의 시대(욜 2:23)라고 한다. 이른 비의 시대에서도 가장 중요한 날은 성령이 강림한 사도행전의 오순절 날이다. 왜냐하면 그날 성령이 비 같이 엄청나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의 부흥의 증상들을 볼 때에 거짓된 부흥이라는 확신이 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다. 그들의 부흥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부흥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자! 원조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이 일으킨 부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인가? 사람이 많이 몰렸들었다는 것인가? 이적이 쏟아졌다는 사실인가? 사람들이 교회에서 서로 잘 뭉쳤다는 것인가?

만일 그것이 사도행전의 부흥의 중심이라고 파악되었다면 당신은 사도행전을 뛰엄뛰엄 읽고 배운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도행전을 바르게 읽고 배웠다면 절대로 그렇게 정리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중심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신학자나 목사에게 물어 보아도 답은 같아야 한다. 만일 누가 십자가와 부활이 아닌 다른 것이 사도행전의 부흥의 핵심이라고 말한다면 별볼일없는 사람일 것이다. 존경받을만한 학자는 더욱 아니고 성령이 크게 쓰시는 목사도 아니다.        

<사도행전의 부흥의 중심은 십자가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십자가와 부활이 사도행전의 부흥의 시작이었고 끝이었다. 그러나 신사도운동의 부흥은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수많은 신사도운동가들의 설교를 들어 보았고, 그들의 글을 읽었다. 그러나 그 자들 중 그 어떤 작자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와 부활을 사도행전의 원조 부흥사들과 같이 전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24시간 기도운동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흥청거리게 하는 IHOP의 마이크 비클의 글도 많이 보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들었던 신비한 음성들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밥 존스 등의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과 꿈 해몽 등의 내용들만 넘쳤다. 한국산 신사도운동파들도 사정을 다르지 않았다. 회개를 강조함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높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중에는 어김없이 십자가의 공로를 배척하고 희석시키는 율법적 회개를 외치고 있었다. 신사도운동의 부흥의 가장 강력한 음모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운동을 일으키는 영은 성령이 아니고, 그런 거짓 영들이 일으키는 부흥은 짝퉁인 것이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였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성령이 강림하자 그곳의 사람들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실제 언어를 말하는 신비가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랬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행 2:12).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이른 비에 묻어서 함께 몰려온 사도행전의 부흥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었다면, 오늘날의 신사도운동의 부흥도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의 흥분과 소동은 곧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아졌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원색적인 부흥을 일으키신 성령이 하셨던 일이고, 이후 모든 시대의 부흥운동에서 계속 해 오셨던 일이다. 부흥의 중심은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었다. 베드로는 그날 예루사렘의 거리에 운집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이 정년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날의 모든 관심과 화제가 이동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부흥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민하면서 괴로워했고, 드이어 예수의 피 흘리고 죽으신 십자가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 성령은 이렇게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결국 성령의 역사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의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엄청난 이적이 일어난 그날 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신 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오게 되었을까? 참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주제가 되었을까? 성령님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은 영혼이 살고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이 일으키시는 부흥에는 이런 일이 가득할 수 밖에 없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3:37).

성령의 역사가 왕성했던 그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되어 비참하게 살고 있는 자신들의 죄와 허물을 깨달았고, 영원형벌의 운명에 처해 있는 자신들의 비참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나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높아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 분이 아니고서는 죄와 저주의 운명을 해결할 다른 신이나 인간이나 제도가 없기 때문이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섬기는 길이 아니고서는 살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주시기로 예정된 사람에게서는 드디어 말씀이 전해시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그가 예수를 주로 믿는 가장 고귀한 이적이 나타난다. 이것이 성령세례이고, 이것이 성령의 부흥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많은 이적이 많이 나타났다고만 자랑하는 부흥사들은 성령이 쓰시는 사람들이 아니다. 금가루, 금이빨, 안개, 방언, 진동, 거룩한 웃음, 실내 단거리 달리기 달리기, 구르기 ... 신사도운동가들의 이런 일들 자체도 웃기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러한 집회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가 높이 선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더 가까이 십자가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마귀가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낸 성과인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였던 그날 이전에 예수를 조롱하며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이변을 일어났다. 십자가의 사형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어이 자신들의 임금과 주로 확정하기 위해 세례를 받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날 예루살렘의 그 큰 대로가 그래서 북적거렸다. 자그마치 그 수가 삼천 명이었다.

사도행전의 대표적 원조 부흥사 베드로가 인도한 첫 번째 부흥회는 이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끝을 맺었던 것이다. 그 뒤를 잇는 사도행전의 수많은 부흥사들의 설교와 강의와 선교에서도 모두 같은 일이 이어졌다. 사도들과 제자들의 전도와 집회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발견한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과 주로 받들어 섬기는 사람으로 변하는 반전드라마의 연속이 사도행전의 부흥이었다. 결국 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직접 연관되지 않는 부흥은 성령의 부흥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각성 운동도 십자가로 돌아가는 부흥이었다!>

사도행전뿐 아니라 그 이후 2000년 교회사에서 계속 이어진 모든 위대한 부흥운동들도 그 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부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사람들을 돌이키는 성령의 역사였다. 교회사의 가장 대표적인 부흥이었던 미국의 대각성 부흥운동을 보자! 대각성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이다. 1741년 7월 8일 코네티컷의 앤필드에서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전했던 “분노한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진 죄인들”이라는 설교로부터 대각성 운동의 불길을 시작되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의 과연 그때 무슨 내용을 전했을까? 그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굳이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 설교는 너무나도 유명하여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그 설교에서 시종일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실하게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받을 무서운 지옥의 형벌에 대해서만 강력하게 증거했다.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교회의 문제는 이름뿐인 크리스찬들(nominal christian), 즉 교회에는 다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여 실제로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일이다.

조나단 에드워는 자신의 청중들 중에도 그런 불쌍한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애통하면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이 장차 당하게 될 지옥의 심판에 대한 주저하지 않고 경고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죄인들에게 곧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했다. 다음은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날 전했던 설교의 일부이다.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진노를 맹렬히 쏟으시겠다는 것은 어떠한 동정심도 없이 징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실 때, 그리고 당신의 불쌍한 영혼이 짓이겨지며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실 때 그 분은 당신에게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진노의 징벌을 경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서운 진노의 폭풍을 가라앉히시지도 않을 것이며,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의 행복을 염두해 두시지 않을 것이며, 엄격한 공의가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이 고통 받지 않도록 지켜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당하는 고통은 너무나도 극심해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도 받고, 예배에도 참석하는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거침없이 전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 드린 설교가 울려퍼질 때에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기 시작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지옥의 형벌 피할 수 없는 자신들의 불행을 깨닫고 절규하였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흐느끼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간절히 구했고, 어떤 사람은 예배당 바닥으로 꼬꾸라져서 울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회개했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이것까지도 각색하여 도용한다. 대각성 운동 때에도 성령의 역사로 드러눕거나, 꼬꾸라지거나, 울부짖거나, 바닥을 굴렀던 현상들이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집회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일들도 성령의 부흥운동에 따르는 현상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그런 점들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지극히 경계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책 <영적감정을 분별하라>(The Experience of That counts)의 서문만 보더라도 마귀가 교회를 죽이기 위해 진정한 부흥을 모조한 짝퉁부흥을 일으킨다고 얼마나 강조했고 경종을 울렸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성령의 참된 부흥의 와중에도 신비적인 요소들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거짓 신앙이 번성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예례미야 3:10절과 4:3,4절 등의 말씀에도 나타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참된 부흥의 중심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는 많은 무리들이 이적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으로 판명된 사람을 극히 소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이적이 일어나고, 신비적인 감성이 충만해지는 것이 부흥이라는 논리는 거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거짓된 부흥을 분별하지 못했을 때 교회에 다가오는 심각한 재앙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거짓 예배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경고였다. 거짓 예배를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할 수 없으므로 결국 그 영혼들이 죽게 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로부터 시작된 미국의 제 1차 대각성 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특징도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사도행전의 시대로부터 거의 2천년이나 지나서 일어난 부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근 수 십 년 동안 쇠파리 무리들처럼 기승을 부리는 신사도운동 부흥사들이 일으키는 부흥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많은 이적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매 주일 심해지고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통회하는 죄인들의 애통이나, 이미 믿는 자들의 가슴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뜨겁게 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이 그들의 부흥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 일하시지 않다는 증거이다.

서울의 한 대형 신사도운동 교회의 부피가 여전히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교단에서 경계하고 모든 교류를 단절하는 조치를 당했음에도 아직 건재한 모양이다. 이곳 미국에까지 그 교회의 목사의 설교 CD가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전혀 부럽지가 않다. 그 사람이 소속 교단으로부터 제명, 출교 당하기 전에 미국의 와서 어떤 교회에서 했던 3일간의 부흥회하면서 했던 설교를 면밀하게 들어서 그 정체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척이나 회개를 자주 언급하고 강조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의 목사와는 다른 특출한 목사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말을 듣게 된다. 그런 면에서는 그도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드와 약간의 유사성이 있는 듯 했다.  

그 사람은 참 실감나게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의 형벌의 실상에 대해서 강조했다. 특히 그 사람의 목소리가 참 인상적이었다. 그런 내용을 소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를 타고 난 사람이었다. 조금 전까지 천상에서 하나님이 주제하시는 회의에 참석하고서 진노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서 급히 땅으로 내려온 선지자 같았다. 실제로 그는 사도직과 선지자직 등의 오중직을 모조리 자신이 차지했다고 자랑했고, 세계 정상급 선지자들(신사도무당들)이 예언을 통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고 했다.

<성령은 언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높인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과 사역 속에서 역사하는 영은 성령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절대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오직 주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강조한 것은 믿음이 온전하게 증명되는 행위와 삶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없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을 직접 들었으니, 내가 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를 왜 주저하겠는가? 구원 받은 성도도 죄를 짓고 충분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내 귀로 들었으니, 그 사람을 부리는 영이 하늘의 우리 아버지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선택된 자녀들에게 보내신 성령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뭘 주저하겠는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높이는 성령의 사역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설교를 듣고서 사람들이 변해버린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극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단이라고 하는데도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만 했다. 아무도 자리를 털고 나오는 사람들이 없었다. 사람들은 점점 뜨거운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흐느적거리면서 맛있는 마귀의 간식으로 요리되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사람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신비한 음성을 듣는 사람, 방언을 처음으로 받는 사람, 예언을 받는 사람, 환상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이런 것 때문에 그들의 부흥은 더 빠르게 퍼진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우리는 항상 성령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게 하시는 분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의 절정은 그가 골고다 언덕에 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시는 순간이었으니, 그가 승천하신 후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보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의 핵심은 당연히 구원받기로 작정된 죄인들이 그의 피 묻은 십자가를 만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복스러운 일이 없이 각종의 이적으로만 가득한 신사도운동의 부흥은 그래서 짝퉁이다. 그들의 집회와 각종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거의 모든 사람이 사도가 되고, 대부분이 선지자가 될지라도 그렇다. 그들의 운동을 통하여 모두가 방언을 받고, 모두가 환상을 보고, 모두가 밤마다 오색영롱한 영계의 뒤안길을 산책하고, 모두가 입신하여 잘생긴 천사들과 데이트하고 온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렇다. 왜냐하면 성령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알리고 자랑하게 만드시는 영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도록 일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의 부흥에는 열매가 없다!>

신사도운동의 부흥을 진정한 부흥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성령의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은 곧 어느 때보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추수의 계절이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부흥이 임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역사가 그 부흥이 진실한 성령의 역사였음을 기록하여 증언하게 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와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1700년대의 제 1차 대각성 운동과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더 크게 일어났는 1800년대의 제 2차 대각성 운동도 그런 부흥운동이었다. 청년 광부 이반 로버츠를 중심으로 일어난 1904년의 영국의 웨일즈 부흥, 흑인 목사 윌리엄 세이모어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에서 크게 일어났던 1906년의 아주사 부흥, 화이트, 맥컬리, 하디 등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길선주 장로와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1907년의 평양부흥 등의 모든 역사적인 부흥이 그러했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예수님은 성령으로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를 바람이 지나가는 것에 비유하셨다. 바람은 보이는 형체가 없다. 그러나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은 산들바람이 지나가면 나뭇가지와 잎이 흔들리다. 큰 바람이 지나가면 큰 나무가 통째로 흔들리고 뿌리째 뽑혀 넘어지기도 한다. 성령의 역사도 그와 같다. 성령으로 인하여 크고 뜨거운 부흥이 일어났다면 오직 성령님만이 하시는 고유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찬미하매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의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영혼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추수의 계절인 부흥이 임하면 그 은혜와 행복이 교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교회 밖의 불신자들까지 하나님을 칭송하게 되고 더불어서 교회도 칭찬받는 곳이 되어진다. 사도행전의 부흥에서는 반드시 그러한 일이 함께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참된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 같은 일이 따라왔다.

대각성 운동의 여파로 이후 미국의 정치와 문화와 교육이 성경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역사가 증언한다.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고, 미국의 정치, 문화, 예술, 경제 등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말씀의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보스톤 지역의 많은 술집들이 사라졌다는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약 5만개의 교회가 새로 개척되었다. 이는 많은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전도와 선교가 크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교들이 이 무렵에 설립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대학가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같은 훌륭한 선교사들이 양육되었고 이후 한국의 역사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의 웨일즈 부흥에서도 같은 일이 동반되었다. 그 지역에서 범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강간, 강도, 살인, 주거침입, 공금횡령 등이 완전히 없어져서 판사들은 재판할 사건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는 할 일이 없어진 경찰들의 업무에 대해 논의를 해야 했다고 한다. 매일 길거리에서 흔히 보였던 술주정뱅이들을 보기 어렵게 되었고, 사생아의 출생률이 무려 절반으로 감소했었다. 이전에는 사나운 광부들의 욕설이 매일 거리를 가득 매웠으나, 부흥이 일어난 후에는 그들의 욕설이 사라졌다고 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바람이 지나가면 이런 거룩한 흔적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성령의 바람의 흔적을 훼방할 수 있는 다른 힘이나 권세는 없다.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부흥의 때에 하나님이 크게 영광 받으시고, 주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의 모습이다.

<부흥의 때에 교회가 멸시받는 현상은 모순이다!>

절대로 부흥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과 교회가 세상의 조롱을 받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일어 날 수는 없다. 부흥이 임한 교회나, 부흥을 이끌어내는 부흥사 때문에 “저런 집단이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안 믿고 말겠다!”라는 세상의 탄식이 나올 수가 없다. 진정한 성령의 부흥이 아니라 마귀의 바람으로 일어나는 짝퉁 부흥이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의 부흥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들이 수 없이 일어났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MBC의 PD 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금이빨을 만들어 내는 부흥사들의 집회를 다룬 적이 있었다. 인도하는 강사 목사의 얼굴은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있었는데, 그는 “여러분의 이가 금니로 변하기 원하는 분들은 손드세요!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 금이빨로 변할지어다! 아말감으로 떼운 이는 금니로 변할지어다!” ... 라면서 집회의 마지막 시간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런 장면이 전국에 방영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우스꽝스런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서 우습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 교회와 하나님을 조롱하는 글이나 영상들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돈이나 여자 문제와 연루된 대형 유명 교회들의 목회자들에 대한 것이다. 또 하나는 개그보다 더 웃기고 한심한 짓들을 선보이는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 영상들이다. “crazy christian”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져 유포된 영상들을 보면 대부분 신사도운동과 관련이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거짓 부흥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일까? 부흥을 찌릿한 감정과 뜨거운 흥분과 신비적인 열기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드리는 삶의 회복이 부흥의 목적이라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본래 제정하신 창조의 질서가 성령의 역사로 다시 회복되어가는 은혜가 부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집회의 열기가 심화되고, 감정의 고양되어 황홀하게 기도하고 찬양하며, 사람들이 급속히 더 모임으로 서로가 신기해하고 놀라는 현상을 부흥이라고 여기고 있다. 죄인들의 오래 짝하였던 죄를 대적하기 시작하고, 너무 찌들어서 분간할 수 없도록 깊이 섞여버린 죄의 줄기들을 하나씩 거두어 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함과 성결함을 회복하여 가는 것이 영적부흥이다.

“육에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내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7-21).

바울 사도는 우리 육신의 속성 속으로 뿌리를 내린 죄의 성향과 종류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성령이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면 이러한 죄성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인하여 압박당하기 시작한다. 영적으로 거듭나서 성령의 소욕이 주도하는 삶이 실현되면 먼저 이러한 육신의 죄성이 다스려지는 증거가 나타나다. 이러한 증거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 죄의 종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다.

<부흥은 성령의 소욕이 육의 소욕을 극복하게 하는 은혜이다!>

부흥이 임하면 반드시 육신이 즐기는 더러운 죄악들이 타격을 받는다.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임하는 참 부흥의 증거이다. 부흥이 뜨겁게 진행되는데, 죄에 대한 고백이나 단절이나 애통이 일어나지도 않고, 다양한 종류의 죄들이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부흥의 열기와 함께 존속해 간다면, 거기에는 죄를 분별하고 대적하게 하시는 성령이 일하시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중대한 사실을 신사도운동의 쟁쟁하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낱낱이 증명해 주셨다. 나는 그 분들이 죄로 넘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이 고소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들도 그분들을 깔보겠다는 것도 아니다. 누가 죄에 대해서 자신하고 장담하겠는가? 모든 인간의 육신은 죄 친화적인 몸이고, 생각과 마음은 이미 부패하여 결코 선을 행할 수 없고, 누구도 복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육신과 정신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단지 내가 말하는 것은 그들이 대단한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엄청난 일을 할 때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도로서 계시를 받고, 선지자로서 예언을 전하고, 각종의 성령의 이적과 능력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을 그때에는 항상 성령충만(?)이 넘쳤던 때이다. 그들에게 성령의 기름이 좔좔 흐르던 때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육신의 부패한 죄의 소욕들이 그 와중에 하나도 숨이 죽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증거가 드러나면서 생명이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신사도운동의 선구자 윌리엄 브랜험에게서 배웠다는 전설의 대선지자 폴 케인은 알콜중독과 동성연애에 빠져있음이 드러나서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청년 시절부터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알콜과 도박에 중독되기도 했었으나 1983년부터 시작된 마이크 비클과의 인연으로 인하여 선지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며 그들의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밥 존스도 자신의 선지자의 권위를 이용하여 여신도의 옷을 벗긴 사건이 드러나면서 하루아침에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초대형 교회인 뉴라이프교회(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였으며, 피터 와그너의 국제사도연맹의 사도회원이었던 태드 헤거드(Ted Hagard)도 그만 마약복용과 남창과의 동성연애가 드러나면서 추락하고 말았다. 이들이 보통의 일반 목사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자기 속의 죄의 성향과 씨름하면서 살고 있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특별한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직통으로 계시와 예언을 받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죄의 공격을 받아 너무도 쉽게 줄줄이 초상을 맞았다. 사도와 선지자 정도가 되었으면 죄에 대해 저항하는 힘이 공수부대 정도는 되어야 한다. 공수부대와 같은 특수부대 정도가 못되더라도 일반 병사들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죄에 대한 영적전투 능력은 동사무소 방위 수준도 되지 못했다. 총 한 번 쏘아 보지 않고 지역 민방위에 편입된 동네 아저씨들 같았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부흥이 가짜라는 것이다. 과연 사도행전의 진짜 사도들 중에서 어떤 사도가 동성연애나 마약으로 생명이 다해 다른 사도의 기도와 상담을 받으면서 절치부심 재기의 때를 기다렸던가? 구약의 어떤 선지자가 자기의 죄로 인하여 넘어져서 성도들의 위로와 기도를 받아야 했었던가? 그들은 톱으로 허리가 잘려 죽을지언정 죄에 굴복한 적이 없었다.

그런 힘과 능력은 그들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임했다. 같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선지자가 되고 사도가 되었으면, 죄를 이기는 힘이 사도행전의 사도와 비슷해야 하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비슷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못했으면서도 사람을 빨리 많이도 끌어당겼다. 그러니 신사도운동의 부흥을 거짓부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특이한 영적인 체험과 분위기가 부흥의 핵심이 아니다!>

무당에게 신이 내리는 것처럼, 예배 중에 찌릿하게 임하는 영적인 느낌과 쾌감과 흥분, 그리고 따라오는 신비한 현상들을 부흥운동과 지나치게 깊이 관련시키면 이런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신사도운동가들과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이 모두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대의 부흥을 빈번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관심을 두는 중심 포인트가 다르다. 신사도운동가들은 감정과 현상에 비중을 둔다. 그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웃고, 구르고, 죽은 듯이 넘어져 있는 등의 감정적이고, 신비적이고, 은사주의적인 관점에서 부흥을 탐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다시 발견한 죄인들에게 나타난 삶의 변화로서 그 시대의 부흥을 조명하려고 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평신도 신사도운동가인 김우현 PD가 쓴 책들을 많이 읽고 있다. 그가 쓴 책 중에 <부흥의 여정>이라는 책도 있다. 세계적인 유명한 부흥운동에 대해서 목회자나 신학자도 아닌 평신도가 매우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하여 나름대로 풍부하게 기술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부흥이 그런 식으로 기술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부흥의 핵심을 항상 “성령이 임했다!”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성령이 그곳에 임하였다!”

이 짧고 간단한 내용이 역사의 모든 부흥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가장 중심적인 코드였다. 이는 매우 위험스러운 시도이다. 그런 식으로 부흥을 추적하고 기술하면 무당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영적인 일들과 기독교의 성령으로 인한 위대한 부흥운동이 결국 비슷해지게 된다.

“그녀가 삼각산에서 신령을 간절히 사모하는 하며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드릴 때 드디어 신령께서 뜨겁게 그곳에 내렸다!”

무속세계에서 코드가 그대로 기독교 속으로 유입되어 모든 유명한 부흥운동을 꿰는 코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김우현 PD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신사도운동가들이 이와 같은 비슷한 방식, 즉, 위로부터의 성령의 내림이라는 코드를 가지고 대각성 운동이나 다른 부흥운동을 기술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으로 위대한 부흥의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서 지난 역사 속의 참된 부흥운동들을 왜곡하는 것을 그대로 두지 말아야 한다.  

<부흥의 여정>의 저자인 평신도 신사도운동가 김우현 PD도 1906년의 아주사 부흥이나 다른 부흥운동을 설명할 때에 “성령의 불이 타올랐다”, “위에서 성령이 내렸다”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였고 특히 다양한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과정을 설명할 때에는 “동일한 영적인 신경센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것이 절대적으로 그릇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기독교의 부흥을 무속신앙의 경박한 부흥의 개념과 유사하게 전락시키는 듯하여 매우 염려스러웠다.

또한 김우현 PD는 신학적 분별력이 없는 성도들이 오해하도록 그릇된 사상을 기술하고 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운명 속에서 신음하는 죄인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중생케하는 성령의 임하심, 또는 신자의 성령받음을 성령세례라고 설명하지 않고 이미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서 더욱 은총을 입은 자들에게 추가적인 봉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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