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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운동의 빗나가는 기도

조회 수 7007 추천 수 89 2010.06.05 03:45:15
<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font color="blue"; 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font></p><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 height:150%">   신사도 운동의 특징은 기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들의 기도에서는 매우 유별스러운 형태가 발견된다. 신사도 운동과 관련된 모든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한번은 집고 가야할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그들의 운동을 통하여 기도의 DNA가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확산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사실 그들은 보통의 성도들보다 더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에는 뭔가 다르고 이질적인 것이 있다. 좋은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을 닮은 믿음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기도와 닮아야 한다. 그런데 신사도 운동가들의 기도는 더 열성이고 극성이지만, 예수님의 기도와도 다른 이질감이 느껴진다.

   "천군천사들은 이제부터 나의 제자들을 지킬지어다!"
   "베드로를 시험에 빠뜨리려는 영은 떠날지어다!"
   "아버지여! 사탄의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을 회복할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주소서!"

   만일 예수님이 극성스런 신사도파였다고 가정해 보았다. 그리고 잡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내용을 신사도파이신 예수님의 기도로 다시 각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7장의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실제의 기도에는 전혀 이런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다.

   영들을 직접 호출하고 명령하는 기도의 패턴, 그리고 직접 칼을 휘두르면서 싸우고 베는 장수처럼 대결, 점령, 승리, 패배 ... 를 외치는 특별한 점들이 신사도 운동파들의 기도에서 발견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별스러운 모양의 기도를 “직격기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예수님은 과연 이들의 직격기도를 즐거워하실까? 그러실 것 같지는 않다. 예수님의 기도 스타일과 그들의 직격기도 스타일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마게도냐지역에서 왕 노릇하는 영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굴복할지어다!"
   "이제 아테네의 땅과 영혼들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변질시키는 거짓의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중보기도에 관하여 가장 많은 가르침을 제시한 사람은 바울이다. 그는 교회들을 위한 자신의 중보기도문을 성경에 기록하였다. 만일 바울 사도도 극성스런 신사도파였다면 어떻게 기도하였을까? ... 가정하면서 유추해 보았더니 위와 같은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러나 바울의 성경에서도 직격기도 스타일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기도는 영혼의 향기이다>

   기도는 영혼의 향기이다. 기도는 믿음의 최고봉이다. 아름답게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보기 좋은 기도의 봉우리가 솟는 법이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에게서 신령하고 아름다운 기도의 봉우리가 솟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기도는 그 사람의 믿음과 영혼의 건강을 잴 수 있는 정확한 Barometer이다. 어떻게 기도하는가? 얼마나 기도하는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 이것이 그 사람의 영혼의 질이요, 향기요, 무게이다. 그래서 좋은 성도는 신령하게, 바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기도한다.

   직격기도를 익숙하게 쏘는 사람들은 결코 약한 믿음을 가진 분들이 아니다. 신앙이 게으르지도 않다. 오히려 더 열성이고 부지런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모범적인 성도로 인정받기 일쑤이다. 그런데 기도가 사납고 교만하고 이상하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의 영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이 진리의 말씀을 먹고 자랐다면 그럴 수가 없다. 말씀 안에서 성령과 동행하며 바르게 성장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 사람의 영혼의 속성을 드러내는 가장 정확한 것은 기도이기 때문이다.

   빈번하게 남을 정죄하고 참소하는 내용을 아뢰는 기도는 교만의 증거이다. 일부러 누가 듣도록 기도하면서 직접 전하지 못할 말을 기도로 대신하는 것은 위선의 증거이다. 늘 정한 시간에 꾸준하게 기도하는 것은 믿음의 성실성과 안정됨의 증거이다. 기도하면서 자주 외치고 소리치는 것이나 늘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기질과 성격의 반증이다. 언제나 기도의 자리에 앉자마자 곧 목소리가 변하고 울먹이는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다가가 아니라 늘 그렇다면 정신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당뇨귀신, 이혼귀신, 가난귀신 ... 기도할 때마다 귀신을 들먹이고 쫓아내는 기도를 반복하는 것도 신앙구조가 건강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 시간, 분위기, 중심 issue들은 우리의 신앙의 영혼의 건강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기도를 듣기만 해도 마음에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정말 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르게 신령하게 아름답게 기도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신사도 운동에 물든 사람들의 기도는 매우 걱정스럽다. 그런 기도 스타일이 우리 주변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중보기도에 관한 걱정스러운 가르침들이 많다>

   남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한다. 과연 보통의 인간이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다. 내가 속한 한국의 교단에서는 인간의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참된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신학적인 차원이 아니다.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말로서 그 보다 더 익숙하고 좋은 말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내가 말하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와 섬김의 행동으로서 단순기도이다.

   나는 중보기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 동참하도록 허락하신 은혜로우신 선물이다. 기도 그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중보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영적인 권세가 기계적으로 위임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겸손하고 바르게 그리스도의 뜻 안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영에 참여하게 된다”

   신사도 운동의 불순한 영향이 바로 여기 남을 위한 중보기도의 분야에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은 다른 교회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중보기도 운동을 전개한다. 중보기도 스쿨, 중보기도 세미나, 중보기도 학교, 중보기도 네트웍 ... 등의 프로그램이 더 많이 발달해 있다. 그런데 이 중보기도 분야가 신사도 운동을 확산시키는 큰 줄기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중보기도는 경지에 도달한 기도장군의 기도이다>

   신사도 운동의 중보기도 패턴이 염려스러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기도가 이미 어느 경지에 도달하여 기도장군이 된 사람의 기도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기도장군”이라 부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매 순간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이 고정된 영적능력을 발휘하면서 기도로 문제를 돌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기도장군들이 정말 그러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태도로 기도하는 것이 참 염려스럽다는 것이다.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하고, 은혜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자세가 매우 약하다는 것이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를 위한 기도이건, 남을 위한 기도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다. 기도하는 인간이 아니다. 우상종교에서는 기도하는 인간이 더 중시된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도가 극에 달하면 하늘도 뚫린다! 는 사상은 기독교의 기도와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우리가 1년 365일 동안 목이 터지도록 기도한들 꼭 그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되게 하셔야 한다는 의무를 지신 적이 없다.

   열심히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의 가장 치명적인 적은 기도하는 자신과 자신의 기도자체에 대한 착각이다. 중보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해 주신다는 그 위대한 사실이다. 기도응답의 기쁨이 힘써 기도한 사람의 열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중대한 믿음의 변질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기도를 기쁘시게 받아주신다는 사실이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남을 위해 기도하여 응답으로 그가 변화되고 구원 받는 것을 보는 기쁨이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쉬운 질문 같으나 참 어려운 질문이다. 그 기쁨은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일치하는 기도를 하도록 성령께서 초대하여 주신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성령께서 바르게 기도하도록 도우심으로 인해 응답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의 비밀이며 특권이다. 그리고 모든 과정의 중심은 기도하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기도 그 자체가 아니다. 언제나 기도에 관한 최고의 중대한 사실은 기도를 기쁘시게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기도의 본질은 겸손한 간구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시작과 마침은 언제나 겸손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 사상에 고취된 어떤 사람들은 독립된 영적권세를 소유하여 이미 경지에 이른 큰 장군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자신이 기도로 명령하면 영적인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고 여긴다. 하나님을 설득하여 원하는 상황을 임으로 다시 조성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권세를 위임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기도하고 선포하면 된다는 자세이다.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고 섬기는 청지기라는 의식도 없거나 약하다는 것이다. 주된 관심과 강조점이 오직 강력하게 기도하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드리는 중보기도 그 자체의 능력이다.  

   신사도 운동에 고취된 사람들 중에 이런 기도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사람들은 그런 강의와 실제 기도를 접할 때에 귀가 번쩍 뜨인다. “기도의 이런 신비한 능력을 왜 그 동안 몰랐을까? 우리 목사님은 도대체 그 동안 뭘 가르치는 거야?” ... 라며 기도에 본격적인 열성을 쏟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영혼을 변질시키는 메카니즘의 출발이다. 그런 기도의 세계로 들어서면서 믿음의 성향이 나쁘게 변질되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다.

   <그릇된 중보기도 줄기를 타고 미혹의 영들이 장난한다>

   나는 지 난 해에 신사도 운동 성향이 강한 한 유명한 선교단체의 훈련에 참여하면서 한 강사로부터 이틀 밤 동안 중보기도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곳에서 이런 그릇된 중보기도 사상이 전파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그 강의의 요지는 "중보기도자는 기도의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함께 이전에 에덴을 함께 거닐었던 존재로 회복된다. 중보기도자는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기도로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사역을 감당한다. 그것이 중보기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으며 우리의 중보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행하시지 못하시며 ..."  이런 내용이었다.  

   그 강의에 의하면 중보기도자들은 역사의 키를 가진 특수 비밀 요원들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행위의 중심은 하나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중보기도 자들의 기도가 된다. 하나님은 중보기도자의 기도 없이는 일하시지 않으시고, 중보기도를 따라서만 행하시므로 역사의 주체는 중도기도자들이 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은 특월한 중보기도자들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이거나 종이라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주체는 절대로 중보기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는 지상의 우주적인 교회가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주체이다. 그리고 교회가 증거하는 십자가의 복음은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능력이다. 중보기도는 교회가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사역을 수행하는 하나의 사역일 뿐이다.  

   이처럼 그릇된 중보기도 사상은 우리의 영과 신앙을 변질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신사도 운동의 신앙을 변질시키는 사탄의 미혹이 중보기도라고 하는 가장 영적인 분야를 통하여 이렇듯 간교하게 들어오고 있다. 아무리 중보기도가 중요한 것일지라도, 그래서 그렇게 배운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힘껏 중보기도를 세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대한 중대한 위협일 뿐이다. 이런 중보기도 사상에 빠져서 열심을 내며 기도하기를 시작한다면, 그 순간부터 이미 믿음의 변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의 미혹의 영들이 거짓된 중보기도 운동의 줄기를 타고 침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분별해야 한다.  

   <천사를 부리는 기도는 성경적이지 않다>

   신사도 운동가들에게는 천사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들의 예언에도 천사가 자주 등장한다. 천사에 대하 그들의 이야기는 주로 다음과 같다.
   ▣새로운 Movement를 감당하도록 돕는 천사를 보내신다!
   ▣새로운 사역을 감당하도록 돕는 권능의 천사가 이미 와 있다!
   ▣이전에 누구의 집회에 자주 출몰했던 능력의 천사들이 이제 누구의 집회에서 자주 목격된다!    
   ▣바울과 함께 로마서를 썼던 고위직 천사가 이제 누구와 함께 일하고 있다!
   ▣플로리다 부흥을 주도했던 그 사람에게는 “엠마”라는 천사가 나타났다!

   신사도 운동권에서는 천사에 대한 목격담이나 다양한 말들이 참 많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천사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또는 유사한 섬김의 태도를 금하고 있다. 천사를 중심에 두는 신앙구조, 천사를 직접 의존하는 신앙자세, 천사를 호출하거나 동원하는 행위, 천사를 부르는 기도 ... 결코 성경적이지 못하다. 천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과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키시고 운행하시는 과정에서 부리시는 영이다(히1:14). 오직 하나님만 부리신다. 천사가 우리의 관심을 받을 이유가 없고, 우리의 신앙이나 기도나 삶에서 천사가 중요한 존재가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미시간의 겨울에는 눈이 많다. 눈길을 자주 운전하는 어느 해 겨울에 어떤 분이 나에게 “나는 눈길을 운전할 때에도 걱정 없습니다. 천사는 이제부터 이 차를 지킬지어다! 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해 버립니다! 걱정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대책이 서지 않는 믿음을 가진 분이었다. 심각하게 말하여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수 없어서 가벼이 웃으며 “그 천사가 하나님 것이지 우리 것은 아니니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에게 하듯이 직접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마십시오!”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꼭 신사도 운동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건강하지 못한 다양한 그룹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가들에게서는 이런 일이 더 빈번하다. 내가 들었던 중보기도 강의에서는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리스도가 위임하신 권세로 천사들을 호출하고 동원하면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중보기도자들의 영적전쟁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중보기도자들이 지속적으로 천군천사들을 호령하고 부릴 수 있는 성경적인 원리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다.

   사실 그 내용은 성령충만을 얻고 유지하는 성경적 원리였다. 기도 응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일반 성경적 원리였다. 그 자체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분별없이 들으면 당연히 아멘!이 연발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좋은 말씀이 엉뚱하게 적용되는 것이 문제였다. 항상 신앙의 문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말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그릇되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고위직 천사건, 하위직 천사건, 이름이 있는 천사건, 이름이 없는 천사건 ... 천사가 자주 거론되는 곳은 주의해야 한다. 특히 강사의 입에서 “여기에 있는 천사! 저기에 있는 천사! 지금 뒤로 돌아가고 있는 천사!, 강단 쪽으로 나오고 있는 천사! 누구 집회에서 자주 보였던 천사! ... 라는 말들이 나오는 집회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 요금 그런 집회는 대부분 신사도 운동가들의 집회이다. 내가 접했던 그 강의의 강사님도 실제 중보기도를 실습하면서 "여기에 있는 천사들은 이 자리를 지킬지어다!"라고 마이크를 붙들고서 고함치고 명령하였다. 이런 현상들은 신사도 운동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도장군님들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오직 하나님만 의식해야 한다. 도대체 왜 천사를 부르고 의식해야 하는가? 왜 그럴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면 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부리시면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신다. 천사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다만 “부리시는 영”이다. 그러므로 천사는 우리 주변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게 일하는 것이 정상이다. 자주 보이면 이상한 것이다. 자주 보인다고 해서 능력이 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더욱이 천사와 대화하거나, 직접 천사에게 부탁하거나, 천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은 절대로 건강한 신앙구조가 아니다. 천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다. 가능한 언급의 대상이 되지도 않아야 한다.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관심과 영광과 찬양과 경배와 기도의 대상이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리 자주 천사를 언급하고, 심지어 천사에게 명령하는 기도 장군놀이를 즐긴다는 말인가? 천사놀이와 별스런 기도운동의 줄기를 타고 사탄의 미혹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선포하는 기도는 어디까지 성경적인가?>

   바른 성경적 기도패턴을 고수하기 위해 꼭 생각해 볼 것이 선포하는 기도이다. 아직 기도의 응답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응답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서 믿음으로 결과를 선포하는 기도를 선포기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과연 선포기도는 기도에 관하여 우리가 꼭 누려야 할 중요한 기도일까? 선포기도를 주로 시행하는 사람들이 신사도 운동과 연관된 사람들인데, 그들은 선포기도가 사장됨으로 우리가 큰 영적인 손실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명확한 선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사도 운동에 빠진 분들이 집회를 인도하면서 맘대로 요리하고 조리하는 기도를 자주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적 선포기도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자리에 앉은 채로 직접 영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가 결과를 임의로 선포하는 말장난을 자주한다.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 자체가 당장 증명될 사안이 아니니, 즉시로 뭐라 말 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그래서 어렵다.

   그런 기도가 믿음의 형태를 띠고 있을지라도 성경이 그런 기도를 보편적으로 장려하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혹시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하신 것이 선포기도의 예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 기도는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실 때에는 주로 “아버지여! ...”라고 하시면서 바라는 바를 간절하게 간구하는 기도를 주로 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눅 22:42, 공동번역)

   혹시 예수님이 결과를 미리 선포하시는 기도를 자주 하셨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이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부터 참여하셨던 성자께서 성부가 위임하신 범위 안에서 얼마든지 결정하시고 선포하실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은 직접 명령하신 적은 많아도, 기도로 선포하신 적은 많지 않으시다. 예를들어 지상에 제자들만 남기고 떠나실 때가 되자 “내가 떠나고 환난이 임할지라도 나의 제자들이 능히 승리할 것임을 선포하노라!” 이렇게 기도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1, 공동번역)라고 겸손하게 간구하셨다.  

   대부분의 바울의 기도도 간구하는 형태였다. 그에게서 선포하는 기도의 흔적이 많지 않다. 다음은 에베소서에 있는 바울의 유명한 기도인데, 역시 은혜를 의지하여 간절하고 겸손하게 간구하는 기도이다.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넘쳐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엡 3:14-19,공동번역).

   “병이 치유될지어다!”
   “죄는 내게서 떠나라!”
   “나를 다시 보혈로 덮노라!”
   “나쁜 생각들이 나에게서 떠날지어다!”

   이런 기도를 들을 때 또 한 가지의 혼란이 다가온다. 우리 자신의 인격, 습관, 태도, 죄성 ... 이런 차원의 문제가 도외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 위에서 짓누르는 영적세력으로만 파악하게 된다. 뭐든지 떠나라! 물러가라! ...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과 인생이 그런 것인가? 혼란스럽다. 그래서 원색의 색동 한복을 입고 방울 흔들며 이쪽저쪽을 향해 "물러가라아~앗!"라고 자주 외치는 그녀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선포기도 하지 않았다 하여 나타날 하나님의 역사가 취소되는 것이 아닌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선포하지 않고 겸손히 간구하기만 하였다 하여 성령이 실망하시고 떠나시지 않는 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바른 믿음에 합당한 기도이고, 어느 선부터는 바른 믿음을 오버하는 기도의 혼란인지 분간이 어려워지는 선포기도를 꼭 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 찌어다! 찌어다! 하며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 대부분이 신사도 운동하는 분들이기에 더욱 걱정스럽다.

   <비인격적 기도는 기도의 변질이다>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의 기도의 또 하나의 중대한 결함은 그들의 기도가 비인격적이라는 것이다. 기도의 분위기와 내용이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하여야 참된 믿음의 기도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성품과 가슴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에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기도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증거이다. 그보다 더한 은혜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이 진정한 중보기도이다. 그래서 신령한 바른 기도의 내용과 분위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발산된다. 남의 대표기도를 듣자가 감동이 되어 눈물까지 흘려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알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 운동의 깊이 심취한 사람들의 기도는 유창하고 현란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이 없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방탕하게 방황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그를 향하여 진실히 중보기도도 하다면 어떠해야 할까? 중보기도자의 입술과 가슴은 가장 먼저 그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을 생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영과 심장으로 그를 위해 중보기도한다고 하겠는가? 기도 속에서 진리의 사랑을 입지 못하여 소망없이 죽음과 지옥을 향하여 다가가는 그 영혼의 비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움이 드러나야 한다. 그것이 바른 중보기도의 가장 성경적인 요건이다. 그 대상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먼 곳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호소하는 것이 중보기도이다.

   하나님은 중보기자의 마음과 기도 속에 흐르는 눈물과 연민과 탄원과 사랑을 보고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바와 그 중보기도자의 기도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시고서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중보기도자 속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렇게 하신다. 드디어 하나님은 응답하시어 그 방탕한 사람이 허무와 죄악을 깨닫고 진리 속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그 과정에서 거짓의 영이 권세를 잃고 떠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벌어질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 고취되어 있는 사람들의 중보기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과 마음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계시와 예언도 직통으로 받는다더니 기도도 직통으로 하시는 것 같다. 그 분들은 기도할 때에 영들(Spiritual Power)을 직격적으로 확실하게 겨냥한다. 중보기도의 대상에 영향을 미치거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짐작되는 영적인 힘을 향하여 정밀 기도폭탄 퍼붓는다.

   “결박하여 저주 속에 살게하는 악한 영의 권세가 깨어질지어다!”
   “어둠의 영들을 물리칠 하늘의 군대를 일으켜 주시옵소서!”
   “하늘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여 거룩한 영적전쟁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

   무조건 대적해야 할 영을 향하여 정조준 사격을 가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여차하면 "나가라! 떠나라! 결박을 풀어라!" ...라고 한다. 기묘한 싸움질을 기도의 앉은 자리에서 다 해버린다. 너무나도 비인격적이다. 당뇨귀신, 가난귀신, 이혼귀신, 혈기귀신 ... 늘 귀신 타령하는 한국의 어떤 이단과 같다. 근본적으로 무녀들과 다르지도 않다.  

   이러한 전투적 기도가 100% 비성경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생활과 영적싸움이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에 속한 일이니 인간의 생각과 환경 외에도 영적인 것들을 다스리고 주무르는 일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고 치우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영적이고 신령하고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오해되니 더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감동과 열매를 달고 사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실한 사랑과 희생과 섬김과 눈물과 순교를 통하여 확장된다. 이것이 중심이 되지 않는 전도학, 선교학, 교회성장학 ... 그 모든 것은 가짜이고 사기이다. 우리 시대의 부흥과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그런 유치하고 사이비적인 쌈박질 기도를 통하여 확장되겠는가? 그들의 이런 기도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그 기도의 대상들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게 하는 연민과 사랑이 생겨나시겠는가? 이방 종교의 사닥스러운 기도와 신사도 운동에 빠진 사람들의 별스런 기도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나님께 합당한 인격성이 결핍되었다는 면에서는 다른 점이 없다.

   <혼란스러운 기도패턴이 등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신사도 운동가들의 기도에서 다양한 염려스런 특징들이 많다. 과연 이러한 기도는 어디까지 성경적이고, 어디부터 거부해야 할 미신적인 기도일까? 혼란스러운 점들이 많다. 다음을 읽어보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란다.

   ▣신사도 운동에 빠진 어떤 사람들은 특정 지역을 자기 구역으로 장악하고 통치하는 “지역의 영”(Territory Spirit)을 의식한다. 그리고 “000 지역에서 왕 노릇하는 어둠의 영은 이제 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아래 굴복할지어다! 이제 이 땅을 떠날지어다!”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신사도 기동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선교가 허락되지 않는 땅에 비밀리에 잠입하여 그 땅을 밟으면서 “이 땅을 다스리면 이 땅의 영혼들을 사냥하는 사탄의 통치는 이제 종식되었다! 이제부터 이 땅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땅임을 선포한다!”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신사도 사상에 심취한 어떤 사람들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십자가를 묻으면서 그 땅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기도 한다.  

   ▣신사도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도시의 가장 높은 빌딩이나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내려 보면서 “하나님의 영들이 가득한 거룩한 도성이 될지어다!”, “죄악과 음란과 탐욕의 영들은 다 물러갈지어다!”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의 집회에서는 종종 큰 깃발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그 깃발이 찬양하면서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군대의 깃발이고 마귀는 그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볼 때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친다고 믿는다. 다음은 유명한 신사도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했던 한 집회의 실황을 전하는 신문의 기사이다. “강단 뒤에는 천사 둘이 나팔을 불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그 옆에 비둘기가 있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젊은 층인 참석자들이 손을 하늘로 향하고 껑충껑충 뛰거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찬양에 몰입하고 있었다. 체육관 곳곳에는 펄이 반짝이는 커다란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도 보였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가난을 물리치고 부를 부르는 기도를 자주 한다. 지갑에 돈이 들어오고 자기의 통장의 잔고가 치유되도록 명령하는 기도도 잘한다. 다음은 한 유명한 한인 신사도 운동가가 어느 집회에서 헌금드린 분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다.

   ““제게 주신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시간 종교의 영을 묶나니, 궁핍의 영을 묶나니, 끊어버리노라.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갈 지어다. 다시 심나니, 믿음으로 내가 축복을 받습니다. 더 나은 직장을 받습니다. 월급의 인상을 내가 받아들입니다. 승진을 받아들입니다.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유업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빚이 끊어졌습니다. 수표가 내게 날아옵니다. 형통함이 옵니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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