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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성경

성경의 방언의 은사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기독교를 확립하는 계시를 보충하는 은사였다. 사도들이 전한 계시와 동일한 정확성과 절대적 권위를 가진 계시는 결코 아니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방언하는 사람의 말을 통역하면 그 내용은 가르침과 권면 등의 예언이 되었다. 방언에 관해 언급하는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면 이 점은 명백하다. 성경의 방언은 실제 외국어였고, 그 내용을 직접 알아듣거나 통역을 통하여 이해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방언에 관해 최초로 언급하는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7-11)


그러나 고린도교회에서 나타난 방언은 성도들에게 생소하였다. 그 뜻을 알아듣고 유익을 얻기 위해서 별도의 통역이 반드시 필요했다.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방언통역의 은사에 대해서 두 번 언급되었고, 방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자세하게 가르치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방언 통역이 5회나 강조되었다. 사도 바울은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일체 방언하지 말도록 했고,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다음과 같이 질서를 갖추어서 방언을 활용하라고 하였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 27,28)


사도 바울은 왜 반드시 방언을 통역하라고 강조하였을까? 성경의 방언에는 분명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역되어 그 뜻이 전달되면 영적인 큰 유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 날의 방언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혹 요즘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느꼈을 것이다. 대부분 먼저 한 말을 나중에 또 비슷하게 하고, 그리고 며칠 간격으로 서너 차례 방언을 하고 그 내용을 통역하면 더 들어볼 새로운 말이 거의 없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사랑하는 자여! 왜 낙심하느냐?”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사랑하는자여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떨 때에는 길 게 소리를 내고서 아주 짧은 한 문장으로 통역한다. 짧게 소리를 내고서 매우 길게 풀이하기도 한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그 내용을 듣지 못한 또 다른 사람에게 통역하게 하면 전혀 다른 엉뚱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많은 실험을 하였어도 한 사람이 낸 방언이라는 소리를 같은 뜻으로 풀이하는 사례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J. I. Packer의 책에서 오늘 날의 방언통역의 은사의 실상을 소개하는 흥미로운 내용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의 한 부족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하였다. 그 모습을 본 어떤 방언통역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은 그가 방언으로 길게 기도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통역을 시도하였는데, ‘재림’에 대한 내용으로 통역하였다. 주기도문 속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것이 현재의 방언통역의 실상이다. 그냥 느낌이 떠오르는 대로 말하면서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방언통역이라고 주장한다. 방언과 방언 통역 등에 대해 경험이 많다는 어떤 한국인 목사의 책을 보았다. 그 안에도 방언을 말하고 스스로 그 뜻을 통역하였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방언이 다음과 같이 통역되었다고 한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어떻게 이런 내용의 방언이 나올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이런 통역이 나올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일개 목사가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인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어 영적으로 해석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 분은 젊은 시절에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자신의 집회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게 말이 되겠는가?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일으키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자이다. 영적이건, 육적이건 목회자가 어떻게 자신의 민족을 이루겠는가? 이런 사람은 이단이라고 몰려도 싸다. 이것이 요즘의 방언, 방언통역의 실상이다.


Packer의 책에는 또 다른 방언 통역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집트의 고대 콥트어로 시편 23편을 암송하였다. 그 사람은 그 시간이 방언통역을 테스트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단지 어려 종류의 언어로 찬양드리면서 예배하는 시간인줄로 알고 고대 콥트어로 시편 23편을 낭송하였다. 그러자 방언통역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들이 통역을 시도하였다. 그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인지, 고대의 언어로 시편 23편을 낭송하는 것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방언통역을 하겠는가? 그런데 그 통역된 내용이 너무나도 황당하였다. 두 사람이 나서서 통역하였다고 한다. 한 사람은 새로운 직장을 달라고 기도한 것으로 통역하였고, 또 한 사람은 중한 병에서 고침받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통역하였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과 방언통역이 이런 수준이었다면 과연 바울은 그것을 교회에서 하도록 권장했을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두세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다른 사람이 통역하라고 하였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그 뜻을 검증할 수 있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나, 하나님으로부터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요즘의 방언, 방언통역의 은사처럼 공개적으로 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는 유치한 것이라면 절대로 교회에서 허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인 서철원 교수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고린도전서의 방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통역자의 통역을 통해 권면의 말을 전하는 방언이었습니다.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었으므로 계시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해설, 설명 수준이었습니다. 권면의 수준이지요. 그러나 방언으로 자기 과시를 많이 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혼란이 많았습니다. 특히 방언하는 사람들이 여자들이었고, 자기에게 방언이 임하면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있는 중에 앞으로 나가 밀쳐내고 자기방언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므로 방언을 말함으로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방언도 무슨 말인지 방언하는 자신도 모르고, 혹 통역한다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통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순절 운동가들은 방언을 통역하면 예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방언으로 전달되는 내용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구약의 성경들보다 더 영감된 말씀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방언에 대한 이런 그릇된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들의 방언으로 전달된 예언이 영감되었다고 하여도 성경에 편입될 수가 없었지요. 내적으로 직접 주어지는 말씀과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사에 숱하게 등장했지만 한 번도 그들의 주장이 교회에 의해서 수납된 적이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통역 없이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17개 언어 종족들이 직접 듣고 이해하는 실제 언어였고, 그것은 종말에 민족들의 언어가 통일될 것을 예시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방언도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니어서 유대인들에게 경고의 성격을 갖는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백성 됨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리는 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방언들과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성령을 받는 것과 방언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방언을 말함이 성령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 기도하는 것이 성령 받았다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입니다(갈 4:6; 롬 8:15). 그러나 지금 일어나는 방언들 중에 성령에 의한 방언이 전혀 없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그런 경우들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에는 알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성경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이 널리 팽배해있다. 한국 교회의 제 3의 물결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조용기 목사의 방언에 대한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여기에 소개한다. 조용기 목사는 방언기도가 바울이 성령세례의 증거로 말한 아홉 가지 은사 중의 하나라고 가르친다.


“방언 기도는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바울이 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의 하나입니다.”


도대체 방언으로 기도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 사도 바울이 성경 어디에서 이야기하였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4-10절의 성령의 은사에 관한 내용에 관한 이야기인 모양이다. 여기에 아홉 가지의 성령의 은사들, 즉 1)지혜의 말씀, 2)지식의 말씀, 3)믿음, 4)병 고침, 5)능력 행함, 6)예언, 7)영들 분별함, 8)방언 말함, 9)방언들 통역하는 은사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조용기 목사는 여기의 7번 ‘방언 말함’을 지금 널리 팽배해진 방언으로 기도하는 현상이라고 연결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완전히 틀린 이야기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고 그 뜻을 다시 헤아려 보니 ‘다른 사람에게는 다양한 방언(언어)을’라고 번역해야 할 내용이다. 여기의 방언도 사도행전 2장의 실제 언어의 방언을 뜻하는 바로 그 단어이다. 성령께서 배우지 않은 언어들로 다른 사람에게 복음에 대해 말하는 은사를 주신다는 뜻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 은사가 분명히 존재했다. 절대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은사를 이야기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도 ‘각종 방언 말함을’이라고 번역하였다.


성경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은사에 관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고전 14:14)라는 내용이 딱 한번 등장한다. 성경에서 방언과 기도가 연결되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러나 전후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사도 바울이 방언과 기도를 연결시키지 말라는 내용이다.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할지라도”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배운적 없는 외국 말하는 은사를 기도 시간에 풀어 놓으면 영혼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지라도 이성은 아무 뜻을 모르니 실질적인 유익이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 바로 이 앞에서도 바울은 이성이 알아듣도록 외국말 방언은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한 마디로 잡소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고전 14:13)


바로 이 말씀 다음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라고 하였다. 통역되지 않는 외국말 방언을 기도 시간에 멋대로 풀어 놓으면 사람보기에는 근사해 보이겠으나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크게 비틀어서 방언 기도가 영의 차원의 기도라고 주장되고 있다.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라는 내용을 곡해하여 정말로 방언이 영혼의 직접적인 기도라는 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 ‘영으로 기도하고’(고전 14:15)라는 내용이 방언기도를 뜻하는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 다음의 ‘영으로 찬미하고’(고전 14:15)는 방언찬양을 뜻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다음의 ‘영으로 축복할 때’(고전 14:16)는 방언으로 축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왜 초대교회 이후 1906년 아주사의 특이한 집회가 있기 전까지 이러한 방언의 기도, 방언의 찬양이 없었던 것일까? 그 중간에 살았던 성도들에게 그런 것이 필요없었는데, 요즘 사람들에게만 필요하게 되었을까?


1906년 아주사 부흥이라는 사건을 통해 방언기도를 체험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1906년부터 새로운 종말의 부흥 시대를 개막하셨고, 그 표적으로 방언을 보내주신 것일까?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세워진 신약의 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후에 차츰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종말의 성령이 부어짐으로 완성되어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는 주장이다. 드디어 아주사 부흥이 터지고, 말세의 성령이 부어지면서 방언과 더불어서 교회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절대로 그런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런 말은 사이비 종말론이다.


방언에 관한 아주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방언에 관한 성경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사람을 대상으로 말하는 실제 언어의 은사였다. 지금 흔히 보이는 모습처럼 방언이 기도하는 영의 언어라면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고’ , ‘성령의 기도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기도하며’ ... 이런 말씀이 수 없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에 대한 언급의 대부분은 사람에게 말하는 형태임을 이야기한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행 2:4)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6)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방언을 말하는 자는”(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고전 14:4)

“방언으로 말하고”(고전 14:6)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고전 14:13)

“방언을 더 말하므로”(고전 14:18)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고전 14:19)

“다 방언으로 말하면”(고전 14:23)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고전 14:27)

“방언말하기를”(고전 14:39)


하늘의 신비의 언어인 방언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성경구절은 방언에 관한 전체 구절의 지극히 일부이다. 그 나마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난해구절들이다. 그렇다면 조용기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례히 강조하는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현상은 과연 무엇일까? 정말 성령의 역사일까? 성경으로 설명되지 않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렇게 흔하고 광범위하게 나타난다고 믿어야 할까? 조용기 목사는 반대로 하나님이 자신의 입을 통하여 메시지를 주시는 방언현상도 공개적으로 시연하고, 또한 하나님이 직통으로 주시는 말씀을 자신이 직접 통역하여 전달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하나님 사이의 직통가교인 것이다. 즉, 계시의 기관이고 계시의 전달자인 셈이다. 상황에 따라서 성경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로 이어지는 영계의 다리이고, 사라진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과 같은 사람인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방언 기도가 성령의 은사라고 바울이 이야기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혀 상관없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였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2-4)


이 내용은 기도하는 방언에 대한 내용이 전혀 아니다. 성령께서 이방인들의 언어를 구사하게 하였던 실제 언어의 방언이었다. 조용기 목사는 방언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오순절 운동가로서 오순절 교회들이 당연시 하는 방언에 대한 내용을 그냥 말하였던 것 같다. 자신에게서도 방언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성경에도 방언이라는 단어가 있으니 당연힌 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운동의 거장이 되었고, 세계 최대의 교회의 목사가 된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말에 의하면 방언 기도가 성령세례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방언기도가 성령세례의 증거라는 주장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성령으로 중생한 신자에게 다시 두 번째로 성령이 특별하게 임재하면서 방언 등의 표적일 동반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성령세례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방언을 그러한 성령세례 개념과 연관시킬 수 있는 분명한 내용이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에 대한 그 어떤 내용에도 성령세례와 방언이 연관되는 흔적이 없다. 물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 방언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오순절 운동의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 12:30)


그리고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한 가르침이 성경적이라면 바울은 마땅히 모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방언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세례의 열매가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이 방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리고 여기서도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방언을 사람에게 말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바울은 분명하게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조용기 목사는 성령세례를 받는 신자들은 모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누구의 복음이 참 복음일까?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항상 방언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기대하며 그 능력에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조용기 목사처럼 이처럼 항상 방언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명확한 근거를 많이 찾을 수 없는 방언기도를 이렇게 근거없이 강조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서 방언 기도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미 보편화된 방언 기도가 비성경적인 거짓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방언 기도의 은사는 뭡니까? 저 많은 사람들이 다 거짓에 속았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이 거짓에 속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어찌 그것이 진리가 된다고 장담하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온갖 미신과 거짓이 넘치는 교황와 마리아의 종교인 로마 천주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12억니나 됩니다. 그 속에서 구원 받는 사람은 몇 %나 될까요? 미신이거나 미혹일지라도 빠지는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시는 것일까요?”


미혹된 사람의 수가 너무 많고, 그들을 참 성도로 인정치 않으면 남는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여 하나님께서 사탄의 미혹을 구원의 복음이라고 인정해 주시지는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그러한 날이 올 것이므로 깨어서 분별하라고 하였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딤전 4:1)



성경의 방언의 목적은 복음전파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여러 나라의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됨을 증거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날 삼 천 명이나 되는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났던 방언의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질서있게 방언아고 또 객관적으로 통역하여 온 교회가 더불어서 유익을 누리게 했다. 다음의 말씀은 방언 속에 계시와 지식과 예언이 내포되었음을 말씀한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 6)


전체적인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방언은 성경이 다 기록되어 보급되지 못한 상황에서 교회에 필요한 말씀을 보조하는 은사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의 방언은 통역의 재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 통역되는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 계시적인 메시지, 가르침, 권면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거의 쓰레기 수준으로 간주하면서 질서있게 방언하고 바르게 통역할 것은 지극히 강조하였다. 과연 오늘 날 이러한 방언과 방언통역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방언과 방언통역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면 성경의 절대성과 완전성과 방언은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방언과 방언통역이 지금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초대교회의 방언은 분명히 계시적인 은사였다. 계시적이라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이 처한 상황에 부합한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일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여전히 나타난다면, 지금 교회 안에는 계시적인 은사를 가지고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서 전하고 가르치는 계시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사도들과 선지자(예언자)들이 현재의 교회의 중심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통으로 말씀을 받아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하며 교회와 신앙을 변질시키는 사람들을 배척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신약의 사도들의 예언을 끝으로 교회와 신앙의 근거와 기준이 되는 성경이 완성되었고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기록된 성경의 내용을 깨닫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 사도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터 위에다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심으로 지어진 건물에 비유하면서 말하였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지금 방언통역 등으로 새로운 계시가 임한다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다져놓은 믿음의 ‘터’를 떠나 새로이 조성된 ‘터’위로 이동되는 것을 뜻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정통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성경적인 교회들은 절대로 새로운 계시의 가능성에 문을 열지 않는다. 건강한 교회들은 더 이상의 계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이 사실이 올바른 교회들 속으로 널리 전파되고 잘 교육되어 이제 감히 방언통역 등의 거짓된 모양새를 선보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운운하면서 설레발 떨며 인기와 영달을 누리는 거짓된 사람들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예언운동가들도 부득이 전략을 바꾸었다. 거짓된 예언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누구라도 감히 “계시를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돌려서 말한다.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주신다!”라고 한다. 그리고 또 알아서 단서를 붙인다. “예언을 통하여 주시는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 성경의 최종적이고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절대적인 계시인 성경의 범위 안에서 분별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IHOP의 마이크 비클, 신사도 운동의 대표사도 피터 와그너 등이 모두 이런 식이다. 그러나 위로이건 권면이건, 혹시 더 말을 바꾸어서 ‘지침’, ‘안내’라고 할지라도, 이런 표현은 다 말장난이다. ‘힌구두’를 다른 사람이 ‘백구두’라고 부르는 것과 같고, ‘일주일’을 다르게 ‘세븐 데이’(seven days)라고도 말하는 것과 똑 같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임하여 온 말씀이라면 빼도 박도 못할 계시이다.


성경의 방언은 무의미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분명한 뜻이 들어 있었다. 성경의 방언은 이방인들의 외국말이었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람들이 듣도록 증거하고 가르치는 말이었다. 그 내용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될 수 있는 가능성은 100%였다. 다만 통역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어서 못할 뿐이었다. 그래서 성경의 방언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었다. 최초로 방언이 나타나던 날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방언이 있는 곳에서는 이방인들도 성령받고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이 인정되어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는 신약의 교회가 공고하게 서는 역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오늘 날의 미혹된 사람들이 자랑하는 거짓된 방언들은 그 어느 나라의 언어가 아니고, 그 안에는 아무 뜻이 없는 소리일 뿐이고, 통역한다는 사람들은 많으나 같은 소리를 비슷하게 통역하는 두 사람을 지구상에서 찾을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경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현상이지만 많은 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니 어쩔 수 없이 기독교의 것으로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귀신에게 미혹되었거나 말씀이 아닌 무의미한 미신생활에 빠졌다고 진단하면, 기독교가 혼란에 싸이고 휘청거리게 될 것이니 이대로 덮고 조용히 넘어가야하는 것인가? 


성경 한 권으로 천년에 걸쳐서 지은 집이라도 과감하게 깨뜨리고 부수는 것이 기독교이다. 지금의 교인들 99%가 성경에서 벗어났다면, 1%만 남기고 다 추방해 버려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그렇게 안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1%도 족하고, 0.1%도 충분하다. 하나님은 판쓸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셨다. 노아의 가족 8명으로 다시 시작하였다. 소수의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진리의 교회를 다시 시작시키셨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 신기를 빼는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만 교회가 살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방언, 방언통역이라는 아무 근거도 없는 현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피터 와그너와 제 3의 물결의 신앙은 결코 수용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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