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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HOP의 선지자와 예언

조회 수 6069 추천 수 71 2010.12.02 02:43:59
<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1.5pt;line-height:150%"><font color="blue"; 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9:09)</font></p><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 height:150%"> IHOP에는 선지자들이 많이 있다. 그곳에 선지자들이 있고 IHOP이 그들의 활동의 무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사도와 함께 신사도 운동을 확산시키는 중심축이기 때문이다. 신사도운동가들은 사도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직통으로 받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영적전투를 위해 지역의 교회를 연합시키고 훈련시키는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선지자는 무엇을 할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서도록 돕는 상황에 맞는 구체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 곤경에 처했을 때, 낙심되었을 때, 큰 갈등에 처했을 때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상황에 관한 말씀을 받아 전하여 안위와 위를 준다고 한다.  

<이제 선지자는 필요없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고 성경적일까? 실제로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의 원리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방식으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기독교에서 신사도운동가들이 말하는 선지자의 기능, 즉 우리가 당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여지도록 돕는 은혜는 어디로부터 어떻게 임할까? 그것의 근원은 성경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상황에 적합한 원리가 될 수 있는 모든 말씀들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성령의 능력 가운데 선포하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조명하심 속에서 받는 모든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모든 상황에서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권면과 책망을 풍성히 공급받을 수 있다. 성경의 정신과 원리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상담과 공부와 그 외의 다양한 말씀 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시고 계신다. 그리고 또한 우리 각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교통하는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하여 질 수 있는 은혜를 공급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던 선지자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예언도 이제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구약의 내용을 잘 알아 그 속에서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면, 그리고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친밀히 교통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성경과 교회 시대의 기독교의 구조이다.  

선지자와 예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IHOP을 무척 좋아하시는 어떤 분이 잠시 동안 나와 토론할 때에 너무나도 단순한 이유를 대면서 IHOP의 선지자의 예언은 당연히 있어야 할 사역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2:28절과 에베소서 4:11절에 선지자가 언급되어 있고, 고린도전서 12:10절에 예언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1절에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고 하였고, 5절에서는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으니 IHOP이 많은 선지자를 가지고 있고, 그들이 늘 예언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하였다.  

그런 분들의 문제는 성경의 선지자와 예언에 대한 언급은 당시 성경이 완성되어 보급되기 전의 교회를 위한 임시적 조치라는 사실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사도, 선지자, 예언을 언급하는 이러한 말씀들은 신앙의 교과서인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한 초대교회의 불안정한 상황을 염두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교회사를 보면 이후 성경이 완성되어 교회에 주어지면서 사도와 선지자와 예언의 기능이 차츰 성경 속으로 흡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적용하는 함으로서 예언이 필요하기 않게 되었고 자연히 예언자들은 사라졌다. IHOP을 좋아하고 특히 그곳의 선지자들에게서 예언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내막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선지자와 예언이 성경에 나와 있다고 우긴다.

그렇다면 그 분들은 바로 이 점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선지자와 예언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 시대의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눈이 없어서 그 구절을 못 보았을까? 성경의 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뜻을 계시하여 주던 이전의 모든 방법들(선지자, 사도)은 중지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던 그 믿음의 선배들은 그 구절을 보지도 않고 그런 선언문을 채택하였을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600년대 중반에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저명한 신학자 153명이 모여 5년 동안 연구하고 토로한 끝에 탄생된 매우 성경적인 신앙의 규범이다. 신사도운동의 사도, 선지자, 예언을 좋아하는 분들이 꼭 읽어야 할 내용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항에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여러 시대에 여러 방식들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고 그의 교회에게 그의 뜻을 선언하시기를 기뻐하셨고, 후에는 그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그리고 육신의 부패성과 사탄과 세상의 악의(惡意)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굳게 세우고 위로하기 위하여 그 계시하신 내용을 온전히 기록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하게 만드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뜻을 계시하시던 이전의 방식들이 지금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던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부패함과 사탄의 간교함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셨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계시)을 전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하였다.

단순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으므로 선지자와 예언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을 중심으로 좀 더 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들을 많이 보유하고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즉석에서 쉽게 예언 서비스를 제공하는 IHOP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선지자의 예언은 믿음을 양육하는 말씀이었다!>
    
사도행전에는 당시 선지자였던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의하면 바나바는 당시에 선지자로 인정되었던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 15장 32절의 내용도 당시의 선지자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본문으로 참고해야 한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고 굳게 하고”.

유다와 실라도 당시 교회에서 선지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당시 선지자들이 전하였던 예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고 굳게 하고”라는 부분이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고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장려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전파하였던 선지자들이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러한 선지자들이 전하는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중심 내용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 보다는 성도의 삶과 신앙을 굳게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 선지자라고 암시된 바나바를 통하여 초대 교회의 예언의 내용과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바나바의 주된 특기는 전도와 양육이었다. 그는 초대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고향에 머물고 있던 바울을 발굴하여 사도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후에 바울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던 마가를 양육하여 크게 성장시킨 사람이다(행 15:39, 딤후 4:11).

바나바는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믿는 자들의 신앙을 탁월하게 양육하였던 말씀의 사역자였지 주로 미래에 대해서 예언하였던 예언자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라고 암시되어 있는 바나바를 통하여서도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었음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데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기능은 오늘 날의 교회의 설교의 기능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예언을 미래에 관한 예측의 기능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늘날 완성된 성경이 있고 성경에 근거한 설교와 다른 사역들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이 잘 양육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미래에 대한 예언하는 예언자가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런 분들은 바나바와 실리와 유다와 같은 초대교회의 선지자들의 사역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더 자세하게 보아야 한다. 현대교회의 다양한 말씀 사역들이, 특히 그 중에서도 설교가 초대교회의 예언을 계승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분이 확실하게 인정되지 않으면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준동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1:18절과 4:14절을 통하여서 당시 선지자들의 예언이 어떻게 실질적으로 교회에서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런 부분을 연구하면 당시 선지자의 예언이 교회와 성도의 신앙을 건강하게 자라도록 양육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

바울이 디모데에게 라고 하였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 디모데의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었다면, 그 다음의 내용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는 부분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그 예언의 내용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갖추고 훈련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말씀들을 디모데는 바울이나 다른 선배에게서 예언의 형태로 받았던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를 따라 선한 싸움을 잘 싸워 이기고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며”(딤전 4:14).

여기서도 예언을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준 내용으로 해석한다면 “조심없이 말며”라는 부분과 조화가 되지 않는다.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예언해 준 말씀을 통해서 그대에게 맡겨진 직무를 등한히 하지 마시오”라고 번역하였다. 당시 디모데는 장로회에서 사역자로 세워지는 어떤 절차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의 목사 안수식이나 선교사 파송식과 비슷한 어떤 형식을 가질 때에 예언의 형태로 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에는 적합한 성경 본문을 읽고 설교의 형식으로 행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직 교회에 완성된 성경이 보급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직접 성령의 감화를 받아 전하는 예언이 그 기능을 대신 한 것이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 21장 10절에 아가보라는 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또한 사도행전 21장 8,9절은 빌립 집사의 딸들이 예언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옛날부터 점하는 여자들을 자주 보았다. 처녀 무당들도 한국에는 매우 흔하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빌립 집사의 딸들이 그처럼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도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성도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언하는 자들은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 14:29).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19,20).

그리고 한편으로 초대교회는 예언으로 인하여 혼란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주 예언의 은사를 조심히 활용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초대교회에는 사탄의 영에 미혹되어서 거짓 예언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사도행전 13:6절에는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가 나오고, 베드로 사도 또한 당시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출현했다고 기록했고(벧후 2:1), 요한 사도(요일 4:1, 계 2:20) 역시 거짓 선지자를 언급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3:1-13절과 디도서 1:5-9절에는 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신약의 선지자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또 다른 본문이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장래의 교회의 교회의 다스림의 체제와 직분제도에 관해 언급한 디모데전서 3:1-13절, 디도서 1:5-9절이다. 그곳에는 선지자에 대한 아무 언급도 없다. 예언이 어떻게 교회에서 활용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언급도 일체 없다.

이 두 성경은 그가 아들과 같은 두 후배 목회자 디모데와 디도가 하나님의 소중한 교회를 어떻게 목양할 것인지를 위해 기록한 일종의 목회가이드였다. 건강한 교회와 목양을 위해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교회의 건강한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을 어떻게 훈련시키고 검증하여 직분자로 세울 것인가를 세밀하게 다루었다. 그런데 그 안에 선지자가 없다. 오늘 날의 목사에 해당하는 장로(감독)와 목사와 협력하여 교회를 섬기는 집사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그 자신이 고린도전서 12:28절과 에베소서 4:11절에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셨다고 분명히 말했으면서 왜 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이 없는 것일까? 다음 시대의 교회의 일꾼인 디모데와 디도에게는 어떻게 선지자를 세울 것인지? 디모데와 디도가 어떻게 선지자와 적절한 연관을 맺는 사역을 할 것인지? 에 대해 한 마디의 말도 없다. 이에 대해서 신사도운동가들은 사도와 선지자를 사람이 훈련이나 교육을 통하여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직접 세우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의 영역이 아니므로 사도 바울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적어도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너희들이 훈련하여 세우는 장로(감독)와 집사 외에 하나님이 직접 세우는 선지자와 사도가 있을 터인데, 그들과 이러 이러한 관계를 잘 발전시켜야 한다!”라는 말이 한 마디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는 바울이 사도 직과 선지자 직이 초대교회의 단회적 직분이었음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차 완성되어 교회에 보급될 성경이 교회 공동체의 절대적 교본이 될 것임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후서 3:16절에서 기록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말씀을 실질적으로 믿었던 것이다. 성경이 완성되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내다보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내는 성경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 교회의 역사는 그 사실이 증명하였다. 사도와 선지자와 예언이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성경이 나타났음에도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종종 출현했지만, 그들은 교회사의 주류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신사도운동가들의 말은 여전히 그럴싸하다. 초대교회가 지나고 더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에 교권과 제도의 횡포가 나타나면서 성령이 교회에서 압박당하고 밀려났다고 한다. 그리고 아테네의 인간의 학문과 정치가들의 연설 문화가 교회에 침투하여 지정적이고 논리적인 기독교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설교자들이 성령의 음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책과 학문을 중시하였고, 특히 정치인들의 연설문처럼 설교문을 미리 작성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됨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는 즉흥적인 설교는 사라졌다고 한다.

참 그럴싸한 거짓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를 바라시고, 또한 그래야만 그 속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을 받아 성경을 더욱 더 온전하게 이해하여 성도들의 삶의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 시대의 신앙생활의 원리인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마약과 같고 소주와 비슷하다!>  

IHOP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왜 우리에게 해로울까? 24시간 기도를 쉬지 않는다니까 무척이나 신령한 것 같지만, IHOP은 우리의 건강한 신앙을 위협하는 불건전한 곳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의  건강한 영적성장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성장은 결국 매일의 일상에 믿음이 박힘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당장 마음을 시원케 하는 한 잔의 소주와 같은 예언에 의존하지 말고, 길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성경 속에서 고민하고 씨름하는 일상이 이어져야 한다.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실제의 일상에 적용하는 것이 결국 영적인 실력이고, 그것이 없으면 영적인 성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은 일상에서 나타난다. 일상의 변화와 성장이 바로 영적인 변화이고 성장이다. 제자훈련은 책상의 공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부여잡고 고민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상의 분투를 통하여 진보한다.

그런데 IHOP의 선지자들은 한방의 직통의 예언으로 끝을 내 줄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IHOP에 가서 선지자를 만나면 쉽게 되는 것을 왜 길고도 아픈 일상을 지겹게 이어가야 할까?”
“왜 우리 목사님은 새로 뚫린 캔자스시티와 하나님 사이의 우주직통 전화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았단 말인가?”

결국 성도들은 이렇게 변질되면서 진정한 제자훈련과 영적성장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IHOP의 선지자들과 그들의 예언을 그들의 아비(요 8:44)가 얻고 있는 성과이다.

혹시 어쩌다 그렇게 문제의 해결을 보았다고 치자! 그 다음부터는 또 어떻게 수 없이 다가오는 삶의 고통과 고비들을 해결해 볼 것인가? 기도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일까?

“캔자스시티로 가겠으니 그곳의 선지자님을 통하여 말씀하여 주옵소서! 헛걸음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까? 이런 기도 외에 다른 기도를 더 길게 할 필요를 느낄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성도의 영적성장이라고 할 것인가? 이것이 제자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베드로와 바울과 ... 성경의 인물들이 다 그렇게 살면서 사명을 감당했었는가? IHOP의 선지자들은 이렇게 우리의 신앙의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IHOP의 거짓 선지자의 예언은 일종의 마약이다!>

IHOP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일종의 마약이다. 그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시원해진다. 물론 후에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 먼 곳까지 찾아간 보람이 느껴진다. 그 맛에 취하면 한국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캔자스시티로 날아가게 된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아픔 당하는 조개의 눈물 속에서 만들어지는 진주와 같은 인격과 삶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가장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없고 인스턴트 깡통 믿음이 크게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서서히 그들의 예언에 중독되어갈 뿐이다. 살다가 또 마음이 흔들리고 괴로우면 어느 덧 매일 밤 천관녀의 집으로 향했던 김유신의 말처럼, 우리들의 자동차들을 이미 캔자스시티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IHOP에 가는 사람들이 그들의 신의 예언의 사슬에 묶이는 것이다.

“어려울 때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고 제 마음에 무슨 반응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주 몇 잔을 마시면 10분 이내에 반응이 옵니다. 금방 기분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성경보다 소주를 더 가까이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가지 문제로 늘 고민이 많았던 어떤 청년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사도운동의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꼭 그와 같다. 당장 기분을 시원하게 해 준다. 무더운 여름날의 차가운 냉장고의 사이다처럼 즉시 내려오는 느낌이 있다. 그러니 누가 괴로울 때에 그 선지자들의 영발이 불건전하다며 그들의 예언을 나쁘다 하겠는가?

“잘 알아서 새겨들으면 되지!”

이렇게 말하면서 괴루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지금도 IHOP으로 가고 있다. 목사도, 선교사도, 장로도, 권사도 누구나 중독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쇠로 만들지 않고 피와 살과 세포로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약함을 그들이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가동하는 IHOP 같은 곳은 즉시 타오르는 불처럼 급속이 부흥한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진정한 영적성장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의 안락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마약기운이 풀릴 때 느끼는 허무함 같은 황량함이 심히 밀려오게 된다. 이것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다. 캔자스시티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에 중독된 수 백 명의 사람들을 상담한 한 크리스찬 상담가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5년 이상 나는 켄자스시티 수도권 지역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 중심으로, 성경을 바탕으로 상담을 해왔다. 그 기간 동안 나는 KCF에 다니고 있거나 다녔던 사람들 100명 이상과 상담했다. 나의 내담자들과의 비밀유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할 자유는 없지만, 수년간 나를 우려케 한 어떤 사안의 개요를 제공할 수는 있다. 이 사안은 2-3 명의 증인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20-30 명의 증인들에 의해 손쉽게 확인된다. 나는 이 사안과 우려를 기꺼이 기록함으로써, 장래 사람들이 미혹에 의해 상처받고, 착취당하고, 조종받을 것을 막으려고 한다."

"두 가지 우려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1)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내담자들이 예언을 받은 경우, 단 하나의 예언도 성취되었다고 내게 보고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과 (2) '교회의 진군을 증진하려는' 미혹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KCF에 있는 선지자들에 의해 (개인) 예언 받은 사람들을 포함한 내담자들을 가지고 있다. 고통의 시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또다른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그들의 고통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더욱 더하게 된다. 자살 성향의 내담자들은, 예언의 미성취를 자신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더욱 자살 성향이 되었으며 심지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Testimony Letter, 15)".

<목회자들도 선지자들을 찾고 있다!>  

목회자들도 평신도들 못지않게 IHOP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많이 구하고 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미혹을 당하면, 그에 따라가는 영혼들이 무수히 많다. 그래서 미혹하는 영들은 먼저 지도자를 먼저 공략한다. 지도자가 선지자에게 미혹당하고 그들의 예언에 빠지면, 그 영향을 받는 많은 성도들이 무더기로 함께 넘어가게 된다.  

다음은 Soma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이 IHOP에서 보신 것을 나누기 위해 내게 신문의 댓글을 통해 알려주신 글의 일부이다. 그 분은 IHOP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시면서 그곳을 방문하여 그곳의 선지자들에게서 예언을 받는 한인 이민교회 지도자들을 많이 보면서 느낀 점들이 올려주셨다.    

“제가 사는 지역의 한인 이민교회의 리더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틈만 나면 IHOP으로 달려갑니다. 그곳까지 가지 못하면 그 사람들을 불러들여 집회를 합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목회자의 숫자가 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주로 중소형의 교회를 섬기시는 분들인데, 그분들 뿐 아니라 선교사로 나가 있던 분들도 합세해서 무엇을 얻을까 해서 집회 장소의 앞자리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 집회에서 그분들의 교단이나, 출신 신학교 ... 하는 것들은 아무런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총신, 장신, 고신 ...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등등이 하나가 되어 소위 "예언기도"를 받겠다고 거지 떼 마냥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그리고는 근본조차 알 수 없는 "모셔온 분들" 앞에 서서는 이마를 내밉니다.

“Fire!”... 라며 손가락 하나를 이마에 대고 외치면 비실거리며 쓰러집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회 후에 앞길을 알고 싶다고 밥도 굶어가며 그분들을 알현하려 또 기다립니다. 몇 십 초의 알현을 위해서 몇 시간을 기다린 후에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잘하는 말 ...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것이다! ... 식의 몇 마디를 듣고 나와서는, 그때부터 그 말의 의미를 찾겠다고 금식 기도도하고 성경도 봅니다.”

IHOP의 이런 북새통을 연출하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는 한인교회의 지도자들의 상태가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선지자로 받들고, 그들의 예언을 갈급하게 구하는 한인 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의 영적인 수준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고, 이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수준이라고 한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집어 넘어가야 할 사실은 IHOP이 이러한 불건전한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짓된 선지자를 육성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다. IHOP이 직접 그 선지자라는 것들의 무대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한다. 24시간 365일 기도하는 신령한 곳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고서, 다른 한편으로 이런 한심한 일을 조장하는 곳이 IHOP이다. 아무리 좋게 말하려고 해도 좋은 말 할 거리가 별로 없는 곳이 IHOP이다.

목사와 선교사도 다 인간이다. 삶의 무게에 지치고, 더 큰 부흥을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 앞에서 좌절하면서 신음하다 보면 간절한 마음으로 돌파구를 찾게 된다. 기존의 것과 좀 다른 해결책을 구하게 된다. IHOP의 선지자들과 그들의 예언은 그러한 목회자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더 탄탄하게 무장되지 못하고, 자신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고 더욱 인내하며 기도하지 못하는 그 본인들의 약함을 먼저 탓해야 당연하다.

그러나 그런 미혹의 굿판을 벌이고서 연약한 인간 지도자들을 사냥하는 미혹의 영들의 안방 노릇을 하는 IHOP과 마이크 비클이 당연히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이런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으면 마이크 비클 목사께서는 그 순수하신 어떤 목사님에게 사도직 소명이 임했다고 예언하였던 그 가증스런 거짓 선지자들을 공개적으로 무릎 꿇려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만일 아직까지도 그 큰 사단을 일으켰던 그 거짓 선지자들이 여전히 참 선지자로 대접받고 있다면, 그들이 여전히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예언하고 있다면 IHOP은 절대로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IHOP은 분명히 미혹의 온상이다. 거짓 영들의 무대라고 단정되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곳이다.    

공개적으로 이 사실을 언급하려니 무척 민망하다. 그러나 지도자들도 쉽게 IHOP의 선지자들에게 미혹 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많은 성도들이 함께 미혹당하고, 교회도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로서 이 보다 적절한 사례가 없을 것이다. 다 알고 있듯이 어떤 유명한 한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IHOP을 자주 출입하였고, 그곳의 선지자들로부터 사도의 소명이 임했다는 예언을 받은 일이 있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음의 두 영상을 보기 바란다.

http://www.youtube.com/watch?v=AbWb1-lR3MU
http://www.youtube.com/watch?v=zLO0lJxxiFQ

그로인하여 2010년의 여름은 정말 무덥고 뜨거웠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사도로 부르셔서 사도적인 Movement를 시작할 것이고, 그 일을 위해 하늘에서 파송된 두 천사의 보좌를 받기 시작할 것이라는 IHOP의 그 선지자들의 예언은 이제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 분은 지금 어디에서 두 천사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사도적 소명을 감당하고 계시는가?

완전히 거짓이었고 전형적인 미혹이었을 뿐이다. 그 분이 사도가 되기는커녕 바로 그 예언 때문에 큰 아픔을 겪었다. 결국 미혹하는 영들에게 휘둘려서 그 본인도 일생일대의 아픔을 당했고, 교회도 엄청 흔들리고 말았다. 결국 그 예언이 화근이 되어서 섬기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그 선지자들의 예언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면 이런 고통스러운 결과가 있을 수는 없다. 그 선지자들의 예언이 아니었다면, 그 목사님은 아직까지 사랑하는 성도들을 행복하게 섬기시고 있을 것이다. IHOP의 선지자들과 그들의 예언에 대해 조금이라도 신뢰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분들은 바로 이 사실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하나님이 IHOP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신령한 예언을 완악하게 거부하고 조롱하는 우리들 때문에 비극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시 아직도 있을까?

<지금의 선지자는 모두 거짓 선지자이다!>

지금은 성경시대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직통으로 받아 전하는 선지자들의 시대가 아니다. 성경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든 완전한 말씀들이 최종적인 법과 기준과 질서가 되었고, 그리고 우리 각자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조명을 참고하여 신앙생활하는 시대이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현재의 기독교에는 선지자나 예언이 필요한 자리가 없다. 그런데 IHOP은 직접 선지자를 키우고, 그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설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그들은 선지자가 되어서 예언을 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예언하게 하는 영은 어디에서 왔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아니면 도대체 뭘까? 하나님도 아니고 사탄도 아닌 다른 어떤 영적존재가 또 있는가? 너무나도 빤하지 않는가?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마 7:22,23).

지금 이 시대에 선지자라 자칭하는 모든 자들은 사탄과 함께 하는 자들이다.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동의하고 확신해야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왜 마이크 비클 목사께서는 그 한인교회의 목사님에게 이미 드러난 너무나도 중대한 거짓 예언을 하여서 그 개인과 교회에 너무나도 큰 혼란을 야기한 그 가증스런 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공개적인 책망이 없으신 것일까? 나라면 그들을 공개적으로 뉴욕을 향하여 무릎을 꿇리겠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거짓된 예언으로 선지자 행세하며 또 다른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겠다. 그러나 유야무야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그 이후에 IHOP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매우 건전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인터뷰 기사를 어떤 한인신문에 실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존중하는 예언만을 받아야 한다.” (prophetic words that honor the written word of God). “삶의 새로운 방향을 알리는 예언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이 알려주신 삶의 방향을 확증하는 예언만을 받아야 한다.” (prophetic words that give us confirmation of a direction the Lord gave us instead of letting others prophesy new direction to our life). “교회와 세우신 영적인 권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고 존중하는 예언사역이어야 한다.” (prophetic ministries that are based in a local Church and under spiritual authority and who honor and serve the larger Body of Christ).

완성된 성경의 시대에 예언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혼란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분이 아니시고 살아계시고 우리와 교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우리에게 오직 나만이 들 수 있는 내면의 음성을 주시는 분이고, 나만이 참고하는 주관적인 확신과 감동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가이드와 터치하심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부인하는 신학은 보수신학이 아니고 죽은 신학이다. 성령과 나와의 개인적인 교통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뭐라고 부를 것인지에 대해 온 세계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서 합의를 본 적은 없다. 어떤 이는 이것까지도 예언이라고 한다.

누가 선지자가 되어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것을 보고 들었으니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 예언의 말씀을 들으시오!” 라며 전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예언이 아니다. 혹시 마이크 비클 목사께서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주관적인 성령의 음성으로서의 예언을 말했다면,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닌 것 같다. 분명히 수많은 선지자 직함을 가진 예언자들이 IHOP는 수두룩하고, 기자가 예언에 대해서 질문 할 때에는 바로 그 선지자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예언을 말하는 것임을 그가 혼동했을 수가 없다.  

그가 기자에게 말한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한 그의 견해를 짤막하게 달리 말하자면, IHOP 선지자의 예언은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위로하고 믿음을 촉진하고 권면하는 것”이다. 내용은 참 좋다. 이것만이라도 지켜진다는 그래도 덜 걱정하겠다.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소문으로만 떠도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다 알려진 그 사실을 한번 만 더 이야기하겠다.

그렇다면 사도의 소명이 임하고, 두 능력의 천사가 강림하여 사도의 Movement를 완수하도록 그 분을 보좌할 것이라는 그 선지자들의 예언의 내용은 신문에 나타난 마이크 비클 목사의 예언에 대한 견해와 일치하는가? 어디를 보아 그 예언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그 본인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믿음을 촉진하는 내용이라 할 것인가? 결국 그로 인하여 그 교회가 이민교회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아픔을 당하였는데, 그래도 그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예언이라 할 것인가?

실상이 이렇다. 말과 이론은 실제와 거리가 멀고 그럴싸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당사자의 인생이 파괴되고, 그 교회가지 심히 고통을 당한다. 이런 사례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니 그루엔 문서를 찾아보면 최고의 선지자라는 밥 존스 역시 얼마나 많은 거짓된 예언을 늘어놓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요사이에만 틀리는 것이 아니다. 밥 존스는 이미 80년대 초 마이크 비클을 만나 둘이서 깨소금 같은 영적신혼기를 만들어 갈 때부터 수 없는 거짓말 예언들을 남발했었다. 일일이 다 옮기는 것도 한심스럽다.        

비교적 최근에 남긴 그의 허망한 거짓말 예언의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다. 밥 존스 선지자는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안수식을 거행하면서 사도가 된 타드 밴틀리를 양아들로 맞는 사람이다. 타드 밴틀리가 잠시 동안 플로리다에서 부흥집회를 요란하게 인도할 때에 밥 존스는 그의 부흥운동이 장차 온 세상을 뒤 덮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타드 밴틀리는 여비서와 안타까운 상황에 빠져 있음이 드러나면서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연약함으로 그런 상황에 빠질 수 있다. 타드 밴틀리를 조롱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그럴 가능성은 있다. 그를 조롱하며 즐기자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다만 어찌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의 영이 내주한다는 선지가가, 그것도 그 세계에서 가장 격찬을 받는 최고의 선지자의 눈이 그렇게 어두울 수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의 눈에는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죄로 인하여 확실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자신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의 허물어지는 영혼의 기둥을 어찌 최고의 대 선지가가 몰라보았을까? 그러고도 무슨 선지자라는 것인가?  

사람들이 얼마나 그런 일에 대해서 잘 기억하고 잘 계산해 내는지 모른다. 밥 존스가 타드 밴틀리의 부흥운동을 높이 띄우고, 플로리다에서 일어난 그 부흥이 온 세상을 뒤 덮을 것이라고 예언할 때에 이미 그는 그 상황에 돌입하여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 선지자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그의 플로리다 부흥운동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온 세상을 덮기는커녕 플로리다 한 구석도 덮지 못하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소위 최고의 선지자라는 사람의 예언이 이 모양이었다.

마이크 비클 목사께서는 지금의 IHOP 이전의 KCF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항상 선지자들과는 가까웠다. 언제나 마이크 비클 주변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우글거렸다. IHOP이 있는 캔자스시티의 한 신문(PITCH지, www.pitch.com)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When his Kansas City Fellowship church was home to the Kansas City Prophets, a group of men whose claims of visions from God”. 기자는 마이크 비클이 담임했던 그 교회를 “선지자들의 집”이라고 했다. 그 당시부터 그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불량한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선지자라 칭하는 모든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이고 사탄과 함께하는 자들이다. 비록 어떤 선지자가 어떤 때에는 맞는 예언을 한두 번 내어 놓았을지라도 이는 사실이다. 어쩌다가 맞는 예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단순히 맞느냐? 틀리느냐? 로 따지자면 모든 예언이 맞을 가능성은 언제나 50%는 된다. 어린 아이의 장난 예언도 맞을 가능성은 50%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예언이 몇 번이나 맞았었는가? 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과연 이 시대에 선지자의 예언이 있을 이유가 있는가? 라는 신학적인 접근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세우신 참 선지자가 있다면 그의 예언은 항상 100% 성취되어야 한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 18:22).

<성경을 읽고 더 기도하며 고민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극히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내주하시는 성령의 밝은 조명을 받아 성경을 바르게 읽고 올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게 우리 각자의 상황에 잘 적용하여야 한다. 그리함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IHOP이나 다른 곳에서 떠도는 그 선지자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이 주는 예언을 핸드폰으로 녹음하고서 두고두고 다시 들으면서 분석하고, 그 내용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늘 기도하여 성령의 밝은 조명을 받아 어리석고 미련한 마음에서 벗어나 신령해지고,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하여 하나님이 뜻하시고 바라시는 것들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보기 위해 고민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영성이다. 이것을 돕는 것이 진정한 제자훈련이다. 선지자의 예언이나 환상, 그리고 천사보기를 영성이라 가르치는 신사도 운동은 결코 상종할 것이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나 환상을 들어야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행 16:10)을 보고서 선교의 방향을 그쪽으로 선회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에게 음성과 환상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때에는 그 방법 외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방향을 바울에게 전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쓰셨다. 다른 방법이 있으셨다면 그런 신비적인 방법으로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 무조건 그쪽으로 선교의 방향을 틀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라고 하였다. 그 전까지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수 없이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좌절당했었다. 그러던 중에 그 환상을 보았다. 바울은 여러 정황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교사역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사실을 자신의 판단력과 분별력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예언이나 환상을 무조건 믿지 말고 잘 분별하라고 가르쳤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확증되는 것이다.  

바울이 선지자의 예언을 무작정 믿지 않고 분별하였다는 명확한 증거가 또 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등장한다. 그는 이미 사도행전 11장에서 큰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적이 있는 당시에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선지자였다. 그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면 포로가 되어 이방인들에게 재판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예언을 듣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고, 결국 로마까지 끌려가서 이방인들의 재판을 받았다. 그 와중에 복음이 로마에까지 더 힘차게 전파되었다.

이 비밀을 아가보 선지자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영적인 분별력과 성숙한 판단력을 발휘하지 않고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만을 따랐다면 지금 세계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선지자의 예언은 참고 사항이었고 분별의 대상이었다. 예언이 절대적인 순종이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와 원리와 정신이 다 드러나 있는 성경이 주어졌다. 그리고 우리 속에 내주하시면서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선지자를 찾아다니고 예언을 귀담아 듣는다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성경시대의 성도의 영성은 내주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어리석고 허망한 마음에서 벗어나 신령한 마음이 되어서 성경을 통해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돈과 쾌락과 온갖 육신의 정욕을 인생의 성공으로 여긴다. 그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해 마음이 부패하고 생각이 미련하고 허망해진 상태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입었으므로 기도할수록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고 어리석은 생각이 신령해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성경의 원리와 정신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성도의 영적성장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절대로 IHOP 같은 곳에 찾아가서 며칠 동안 살다가 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다시면서 좋아 보이는 것을 일찍 따라하고 도입하면서 특이한 기름부음도 받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떨리는 가슴으로 선지자님을 만나 예언을 받음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오직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성경을 더 읽으세요!”
“출근하기 전에 새벽에 일찍 교회 나와서 기도하세요!”
“먼데 찾아가지 말고 가까운 교회에서 더 많이 기도하세요!”

그러면 되는데 왜 그 먼데까지 가서 거짓 선지자들을 만나고 오는지 정말 답답하다. 지금까지 오랜 동안 예언해 온 IHOP의 선지자라는 존재들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들의 예언도 지금의 기독교의 구조에서는 그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IHOP에는 갈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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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손기철 장로,「알고싶어요 성령님」에 대한 서평 2013-04-27 51196
34 '신기'를 부르는 '성령의 기름부음' 타령 2013-03-16 7567
33 방언(1) - "십자가 복음이 완성된 구원계시임을 증거했던 방언" 2013-03-02 7545
32 예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중보기도운동 2013-01-12 6797
31 중보기도 사상은 비성경적 2012-12-10 8105
30 인터콥(최바울)의 변함없는 신사도운동, '백투예루살렘' 2012-11-02 7180
29 요즘 유행하는 이상한 기도 2012-09-08 11911
28 예언,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가? 2012-08-17 12176
27 방언(4) - 릴리리리 우알랄라! ... 성경의 방언일까? 2012-07-29 32850
26 인터콥(최바울)의 신사도 운동 2012-07-23 12095
25 찬양 속에 흐르는 사탄의 술수 2012-07-14 9617
24 에스더기도운동 측의 반론에 대한 보충설명 2012-06-19 13187
23 에스더기도운동의 신사도운동 2012-05-29 8381
22 배교의 징조 - 동성애자 안수 2012-05-22 6613
21 에스더기도운동의 중보기도 운동 2012-04-30 6175
20 하용조 목사와 온누리교회의 신사도운동 2012-03-04 19135
19 송만석 장로 등의 이스라엘 운동은 그릇된 사상 2012-02-07 8475
18 김하중 장로의 하나님은 부채도사인가? 2012-01-24 10516
17 이방 종교의 영성과 유사한 손기철 장로의 이적 2012-01-06 7823
16 방언,성령춤도 주는 귀신들 2012-01-03 10349
15 손기철 장로의 기름부음의 정체 2011-12-23 6804
14 신사도운동의 거짓부흥 2011-11-22 6371
13 손기철 장로의 신사도 운동 2011-11-22 6494
12 IHOP의 끝이 보인다! 2011-06-03 8150
11 IHOP의 24/365 중보예배 2010-12-15 10578
» IHOP의 선지자와 예언 2010-12-02 6069
9 IHOP의 사도적 리더쉽 2010-12-02 11893
8 신사도 운동의 빗나가는 기도 2010-06-05 7007
7 신사도 운동의 사도와 선지자 2010-05-12 6925
6 신사도 운동의 쓰러뜨림 2010-02-21 7297
5 신사도 운동의 기름부음 2010-02-10 9513
4 신사도 운동의 Back To Jerusalem 2010-01-30 9013
3 신사도 운동의 예언 2009-12-14 6622
2 신사도운동의 회개 2009-12-03 6675
1 신사도 운동의 금이빨 2009-11-24 1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