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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21시간

조회 수 13980 추천 수 138 2011.04.20 04:02:23
<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font color="blue"; 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height:15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시니라”(요19:30)</font></p><P align="justify" style="width:620px"><font style="font-family:굴림;font-size:10.5pt;line- height:150%">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망의 속박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속죄의 제사가 드려진 계절을 맞았다. 이번 주 금요일(Good Friday)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이 그 절정에 이른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처참한 수난이 가차 없이 엄습했던 그 마지막 하루를 다시 돌아보자. 그리함으로 우리 모두가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다시 생생히 느끼면서 십자가를 간절하게 붙들고 남은 생애를 살기 바란다.  


1. 유월절 만찬을 받으심(목요일 밤 6-9시)

마지막 주간의 수요일부터 목요일 해질 때까지 예수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찾아오는 고난을 예상하기면서 십자가를 지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을 것이다. 성경은 목요일 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받으신 때부터 마지막 하루, 정확히 말해 지상에서의 마지막 21시간의 고통의 일정을 기록하였다.  

BC 1,447년 출애굽 당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시는 마지막 재양이 일어나던 밤에 양의 피를 대문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에는 임하지 않고 비켜 지나가도록 하셨다. 그 날이 유월절(passover)의 기원이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하루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받으신 그 날이 바로 그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첫 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날 모두 모여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일주일간의 유월절 절기를 지켰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월절 만찬을 잡수셨다.

그런데 이 만찬이 준비된 과정이 매우 신비하다. 이날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은 이미 만찬이 준비되었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한 가정으로 인도하셨다.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이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게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눅22:10-12).

예수님은 이제 곧 이스라엘과 인류의 영원한 속죄와 해방을 위해 하나님의 속죄의 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자신을 기념하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신 것이다. 유월절 만찬장에서 중요한 세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배반하고 있는 제자 유다에게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경고를 주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14:2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요13:26)

유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배반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운명을 하나님으로부터 타고 났다고 주장하는 신학은 거짓이며 모순이다. 유다 자신이 얼마든지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예수님 일행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자주 은밀하게 공금을 훔치는 자였다. 유다는 평소에 불의한 일을 행하면서 이미 마귀에게 포로되어 있었다.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유다는 스스로의 의지에 근거하여 마귀에게 지배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소용된 불행한 인물이다. 그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께서 수차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가 악한 길에서 돌이킬 의사가 없었다. 예수님은 결국 유다를 버리셨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13:27),

둘째,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이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바로 다음 날에 십자가에서 찢어질 자신의 육신과 흘릴 피를 떡과 포도주로 상징하여 기념하게 하셨다. 그것을 예수님의 피로 가정하여 먹고 마시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와 그 당시의 제자들과 이후 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관계가 오직 십자가에 근거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늘 새롭게 갱신하게 하셨다. 이후 성찬식은 교회가 영원히 실천해야 할 사명이면서 동시에 은혜를 경험하는 중요한 방편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셨다.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몸속에서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하다거나 떡과 포도주 자체가 예수님의 임재와 현현이라는 천주교의 성체사상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셋째,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 타인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심적인 특징이며 identity라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만찬을 마칠 무렵에 전혀 예기치 않게 제자들 사이에 장차 누가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자 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으로 오해하고서 그릇된 착각에 빠져 들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친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다. 이는 샌달을 신고 사는 유대인들의 일상과 문화 속에서 흔히 보여지는 관례였다. 그러나 남의 발을 닦는 일은 언제나 그 집의 하인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예수께서는 높은 선생님이었으나 친히 허리를 굽혀 낮은 제자들의 발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예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속된 가치와 오만한 문화에 세뇌되어 군림하고 대접을 받는 것을 성공의 증거로 인식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세상적인 권위나 군림의 질서가 아닌 겸손과 사랑과 섬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 마지막 밤에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래서 친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자기보다 못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본을 보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우리는 타인의 섬김을 받는 것이 큰 성공의 증거가 아니라 진정으로 남을 유익하게 하는 섬김을 베푸는 것이 성공을 증거라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넷째, 잠시 후에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모두 도망 할 것과 특히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기까지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 22:34).  



2.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심(목요일 밤 10 ~ 12시)

한 사람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살고자 하시는 육신의 욕망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만백성을 구원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신적인 의지가 마지막 각축을 벌였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고 자신을 내려놓기로 작정하셨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예수님의 이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은 인간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힘을 더하셨다. 이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임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신 예수님을 도우셨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22:43).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그러나 시간에 안타깝게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그 시간에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기도하지 않았던 그들에게는 곧 다가올 엄청난 고난과 환난을 이길 특별한 능력과 힘이 임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후에 제자들은 철저하게 패배하며 침몰했다. 자기의 한 목숨을 챙기기 위해 체면도, 의리도, 믿음도 버리고 도망하여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기에 바빴다. 누가 이들이 훗날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대 홋날 이들은 세상을 요동하게 하는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었다. 아무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능력있게 증거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군사들로 변했다. 예수를 죽인 바로 그 관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선포하는 자들이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니”(행 4:19.20)기를 시작했다. 비밀은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을 얻기 이전의 사람과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사람은 같은 사람일지라도 전혀 다른 사람이다.  

믿음의 승리는 충분한 기도와 기도를 통하여 얻는 성령충만에 달렸다. 늘 기도하였던 예수님은 그 무서운 밤에도 완전하게 승리하셨고,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완전하게 패배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완전한 승리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쉽게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늘 쉬지 않았던 예수님의 기도에서 기인한 승리였다.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려면 누구나 기도해야 한다. 한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기도하여 하늘로부터 임한 능력을 받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려면 누구나 기도해야만 한다.  


3. 체포되심(금요일 새벽 0시 경)

대제사장과 빌라도가 보낸 자들에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런데 체포되시는 그 상황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 벌어졌다. 예수께서는 나타난 군병들과 대제사장의 하속들에게 그들이 찾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당당하게 밝히셨다. 그런데 그들이 혼비백산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18:6).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은 체포하러 온 사람 중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려나간 사람의 귀를 고쳐주신 것이다. “그 귀를 만져 낫게하시더라”(눅22:51). 이때 무슨 정신이 있어 자기를 잡으러온 사람의 떨어진 나간 귀를 치료하신다는 말인가? 보통 사람들의 상황에서는, 특히 일반 범죄자가 체포되는 상황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심지어 자신을 잡으러 온 모든 이들을 위해 스스로 죽으시기 위해 끌려가시는 메시야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다. 어떤 제자는 군병이 겉옷을 붙잡자 겉옷까지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14:51,52). 아마도 그 청년은 그 기록을 남긴 마가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한 청년”이라고만 하였던 것 같다.

제자들 중에서 최고로 용감했고, 스승에 대한 도리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유일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눅22:54). 그러나 조금 후에 베드로는 차라리 따라가지를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4. 두 제사장으로부터 심문을 받으심(금요일 새벽 1 ~ 3시 무렵)

예수님은 전직 제사장의 집과 현직 제사장의 관정으로 끌려가셔서 고초를 당하셨다. 이 부분은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으면 정확하게 발견되지 않는 부분이다. 전직 대제사장과 현직 대제사장의 그리 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먼저 전직 대제사장이며 현직 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다.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요18:13).

원래 율법에 의하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제사장의 직분이 승계되어야 한다. 대제사장의 직분이 장인과 사위 사이에 승계된 것은 명백한 불법이며, 로마 정권에 아부하여 얻어낸 세속적인 명예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당시에 이미 정통 제사장의 가문의 맥은 끊겨 사라지고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세우시기 위해 섭리가운데 대제사장의 계보를 끊어버리신 것이다.

안나스의 집에서 예수님은 감히 대제사장의 말에 대꾸한다고 하여 뺨을 맞으셨다. 이 과정을 숨죽이고 지켜보던 베드로는 한 하녀(여종)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요18:17)라는 말을 듣는다. 잔뜩 겁에 질려있던 베드로는 가차없이 주님을 부인했다. “나는 아니라”(요18:17).

예수님은 다시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으로 보내어지셨다.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요18:24). 현직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입법부이며 사법부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최고 의장직을 맡고 있었으므로 이곳이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종교재판정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않은 신정국가체제였다.  

베드로는 이곳까지 또 따라갔다. 그래도 제자들 중에서 주님에 대한 의리와 사랑이 가장 강했던 사람은 베드로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다만 그의 믿음이 그 무서운 시간을 이기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안나스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쪽 가에서 불을 쬐면서 돌아가는 정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그가 몇 시간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칼에 귀를 다친 사람의 친척이 베드로를 알아보고서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으냐?”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또 예수님을 부인(저주)하였다.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예수님을 부인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닭이 울었다.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 18:27).

가야바의 재판정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당당히 밝히셨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그때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었다. 신성모독적인 가증한 발언을 차마 더 들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곳에 모인 모든 공회원들이 대제사장의 뜻에 찬동하여 예수님을 죽이자고 입을 모았다.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 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14:65).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산헤드린 공의회의 사형판결이 확정된 것이다. 새벽 3시경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상에 새벽 3시경에 한 사람을 죽이는 판결을 내리는 재판정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던 산헤드린 공회의 실상이었다. 예수님에게 죽을 죄가 있다고 정죄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결정은 법을 가장한 참혹한 살인극이었다.  



5. 총독 빌라도의 재판정(새벽 3-4시 경)

당시 로마에게 정치적인 속박 상태였던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공의회의 결정은 종교적 범위에만 국한되었다. 한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하여 집행하는 일은 로마 정보가 임명한 총독 빌라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로 작정한 대제사장 일행은 예수를 끌고 총독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죽여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부탁에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그 일행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23:4)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온 이스라엘을 선동하고 다니는 위험인물이니 죽여야 한다고 더욱 간청했다.

이날 새벽에 벌어진 총독 빌라도의 재판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대제사장과 그 일행들은 이방인의 재판정이 더럽고 불결하다 하여 그 재판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 들여보냈다. 그리고 자신들은 재판정 밖에 있으면서 재판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재판장인 빌라도가 피고소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재판정과 고소인들이 있는 재판정 밖을 수 없이 들랑날랑하면서 희대의 재판을 진행하는 진귀한 풍경이 벌어졌었다. 한 의로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발악하는 유대지도자들의 모습이 이렇게 한심스러웠다. 자신들은 불결하다면서 들어가지도 않았던 이방인의 재판정에 예수님을 밀어 넣고 죽여 달라고 이방인에게 간청하였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나 합당한 명분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이 꾸미는 그 사건에 말려들기 싫었던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재빨리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 왕 헤롯이 맡아야 할 사건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헤롯왕에게 보냈다(눅23:6,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눅23:7).

마침 그 날 헤롯은 갈릴리의 자기 임지를 떠나 잠시 동안 예루살렘에 방문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일 그가 그날 갈릴리의 자기 왕궁에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중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6. 헤롯왕의 조롱(새벽 4-5시 경)    

헤롯은 이방인으로서 로마에 절대적으로 충성하여 BC 40년에 이스라엘 전 지역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 대왕의 여러 아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은 로마로부터 직접 임명된 총독이 관할하였고,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진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의 통치권은 헤롯 대왕의 배 다른 세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었다. 그들 중의 한 명이 바로 갈릴리 지여의 분봉 왕 헤롯이었다.

그는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부인으로 취하였던 일로 세례 요한에게 크게 책망을 당하였던 사람이다. 그 일로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을 미워했고, 결국 남편의 생일 파티에서 딸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여 세례 요한을 참수하게 하였다.

이러한 전력을 가진 헤롯왕은 예수님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보내었을 때에 특별한 이적이나 마술을 보고자 하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대하였다. 예수님이 그에게 일체 대꾸하지 않으셨다. 헤롯은 예수님에게 왕 노릇이나 해 보라는 조롱의 의미로 왕을 상징하는 화려한 옷을 입히고 희롱하다가 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성경은 빌라도와 헤롯이 평소에는 원수지간이었는데, 이 날 반에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23:12). 이는 교회를 훼방하고 하나님의 일꾼들을 괴롭히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비록 각각 독하고 사나운 고추장 같을지라도 마귀를 위해서는 힘을 합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이다.



7. 빌라도의 사형 확정 판결(새벽 6시경)

빌라도 다시 원하지 않은 상황을 떠안게 되었다. 다 시 한번 예수님에게 죽일 만한 죄가 없으므로 심히 때려서 방면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죽여야 한다고 외쳤다. 빌라도는 다 시 한번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실제로 죽일 사형수 한 사람을 방면하는 유월절 전례를 따라 예수님과 바라바라는 진짜 사형수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 달라고 하였다. 빌라도는 속으로 제발 “예수를 선택해라!” ...라고 빌었지만, 어찌된 영문이지 유대지도자들과 그 하속들은 정말 죽어야 할 죄인인 바라바를 선택했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세 번째)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눅23:22)라고 하였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마음에 만족을 준 후 풀어주려고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 세우고서 그 몸이 피로 얼룩지도록 잔인하게 채찍으로 때렸다. 결국 이때의 출혈로 인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지 불과 6시간을 견디시다 일찍 임종을 맞으시게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더 큰 소리로 간청한다. 결국 빌라도는 재판장으로서 목숨처럼 지켜야 할 공의와 정의를 버리고 말았다. 고함치는 사람들의 원대로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하신 권세로서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릴 수도 있었지만 여론을 좇아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는 머지않아 총독의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그리고 이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의 남은 인생을 불행했다고 한다. 그 날 밤에 예수를 조롱하였던 헤롯은 광인이 되어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빌라도는 이후의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통하여 영원히 저주받는 사람이 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8. 형장으로 십자가를 지고 이동하심(아침 8시경)

사형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형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사형수였던 예수께서는 자신이 달리실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형장으로 가셔야 했다. 그런데 이미 채찍질을 많이 당하셔서 출혈이 심하셨다. 육신의 기력이 너무 쇠하여서 십자가를 지시기는커녕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드셨다. 로마는 죽일 사형수에게는 매질을 하지 않았지만, 가급적 예수를 죽이지 않고 살리려 했던 빌라도 때문에 예수님은 맞지 않아도 될 채찍질까지 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우리가 당할 저주와 형벌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하여 그를 철저하게 저주하신 것이다. 그의 받으신 저주로 인하여 우리를 넉넉히 죄와 사망의 정죄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매질를 당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기진하여 쓰러지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연히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의 언덕까지 갔다(눅23:26). 시몬은 비록 억지로 그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의 고난을 덜어드린 가장 영광스러운 봉사를 드린 사람이 되었다. 아마 그는 훗날 한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죽도록 충성을 바쳤을 것이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우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지만, 우리는 다 알고서 스스로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이다.


9. 십자가에 못 박히심(금요일 오전 9시)

고대세계에서 십자가는 카르타고를 비롯한 몇 몇 국가들에게서 흉악범들과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도구였다. 십자가가 사형 틀로 제도화 된 것은 로마시대부터였다. 로마는 자국의 귀족들과 시민권자들을 처형할 때에는 십자가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식민지의 흉악범들과 반역자들을 처형할 때에는 십자가를 이용했다. 반란을 평정한 후에 로마제국은 한번에 약 2,000개의 십자가에 죄수를 달아서 길 가에 가로수처럼 세운적도 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천천히 피를 흐리면서 죽어간다. 추위와 더위에 신음하면서 몇 날 동안 서서히 죽어간다. 한 건장한 노예 죄수는 15일 동안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고통을 당하다 죽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벌거벗고 수치와 치욕을 당하면서 죽어간다. 흐르는 피 냄새를 맡은 독수리들이 십자가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하고 때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죄수의 눈과 장기를 독수리들이 쪼아 먹기도 한다.

십자가의 형벌은 가장 잔인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잔인하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달려 골고다의 언덕에 세워지던 그 때는 로마시간으로 제 3시였다고 한다. 지금의 시간으로는 오전 9시이다.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15:25)
  
오전 12경이 되자 하늘이 밤처럼 어두워져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오후 3시경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차마 그대로 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막15:33)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채 일곱 마디의 최후의 말씀을 남기셨다.  

첫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둘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23:42)

셋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

넷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다섯째, “내가 목마르다”(요19:28)

여섯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요19:30)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이때가 오후 3시였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신 것이다.

“테 텔레스 타이”(다 이루었다)라는 그리이스의 예술가들이 귀한 창작 활동을 할 때 그 작품을 다 끝내고 나서 기쁨으로 끝마쳤음을 자축할 때 쓰는 말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위대한 대단원의 드라마를 온 몸으로 다 감당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축하시면서 숨을 거두신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구원은 완전히 완성되었다. 구원에 관하여 이후 또 다른 누군가의 수고가 필요하지 않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악독한 누구라도 그의 십자가를 온전히 의지라고 믿으면 여지없이 구원받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형집행 책임자였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이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고서 예수님이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가로되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하고”(눅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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