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성례적인 사물이 존재하였습니다. 첫째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생명나무 열매에 영생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면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막으셨다고 합니다. 옳지 못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 주신 영생의 은혜를 상징하는 표시로서 생명나무를 두신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을 지시하는 ‘표징’(상징)으로 받을 때 은혜를 주시는 것처럼,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이미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생의 은혜를 표시하는 상징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주하시고 영생의 은혜를 거두신 후에는 생명나무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은혜가 더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것을 먹으면 이전처럼 영생하는 줄 알고 미신을 행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이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에서는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노아에게 특별히 지시하신 무지개도 자연 속의 성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평범한 자연의 현상인 무지개에다 특별한 의미, 즉 이후 다시는 홍수를 인간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표징으로 무지개를 제시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지개 속에 비가 과도하게 오는 것을 막는 과학적 기능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신실성을 표시하는 증거로 기존의 무지개를 이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실한 약속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노아에게는 무지개가 성례였던 것입니다.
이상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4권 14장 16절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신학처럼, 세례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고, 계속 성찬을 먹음으로 더 의로워지고 더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미 확실하게 주신 은혜를 다시 확인하고 선포하니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우리의 믿음이 더 강화되는 것입니다.